매일신문

매일춘추-공간의 여유, 삶의 여유

한참이나 아득한 2천500년전 중국 성인의 고전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고전에 담긴 사상적 가치나 강론자의 개성을 떠나 시공을 초월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문명을 앞지르는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공허하기만 한 삶, 황폐해가는 정신문화를 충족시키는 진정한 삶의 가치와 실천 해법이 수천년의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선현들은 '비어있고 고요하며 다투지 않는 삶'의 방식을 세상사의 교훈으로 생각하고, 무위자연사상을 건축과 생활공간 속에서 실천해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아왔다. 경관이 좋은 곳은 누(樓)와 정자를 만들어 현실 목적기능만이 아닌 우주적 자연을 교감하고 향유하는 고도의 정신적 사이버공간을 구축해 활용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산수가 뛰어난, 조용한 산기슭의 향촌에 위치한 향교는 배움의 장소만이 아닌 선현을 받들고 수양하고 도의를 실천하는 종합공간이었다. 안강의 독락당, 담양 소쇄원, 안동 병산서원, 영주 부석사에서 느끼는 감동을 단순히 아름다운 전통 건축물이라고만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풍수지리학과 조형미, 건축론만이 아니라 성리학적 수양론, 불교적 우주론을 포함해 곧 자연을 문화화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자연 장소 공간을 통해 풍류와 사랑, 은둔과 실천, 삶과 지혜까지를 깨우치지 않았을까?

현재 우리는 이 도시 속 어디에 자기만의 공간을 간직하고 있는가? 지친 삶을 잠시 쉬게 하고 새로운 용기와 지혜를 충전할 공간, 잠시 도시를 탈출하고플 때 은거할 수 있는 진정한 장소 말이다. 사춘기 청소년들은 외로움을 숨길 은밀한 다락방, 혼자 오르던 사색의 뒷동산 언덕을 잃고 PC방이나 컴퓨터 가상공간에서 밤을 지샌다. 대화방과 노래방, 찜질방, 구이방은 많지만 고독할 때 벗을 청해 밤새 술잔 기울일 수 있는 사랑방은 현대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이 없는 만큼 우리네 삶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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