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기홍칼럼-이 벌건 대낮에!

정치의 힘이 참으로 무섭다. 정치적 배경이 발휘하는 권력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시대인들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말한다. 한 시대의 사회분위기를 지배하는 정치의 힘을 말한다. 한 사회의 수준이 정치의 수준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치의 수준이 그 사회의 수준을 결정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정치가 천박해지면 그 사회 또한 천박해질 수밖에 없다.

독일 유학시절 독일 사회의 정권교체를 경험한 적이 있다. 정권교체후 불과 일주일 안에 엄청나게 달라진 사회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슈퍼마켓에서 어느 귀부인으로부터 '이제 드디어 유럽인이 아시아인보다 앞서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과 함께 뒤로 떠밀리기도 했다. 그 동안 6년 넘게 친교를 맺어왔던 인자한 독일 할아버지로부터 느닷없이 자신이 사실은 나치 장교였다는 '자랑스러운' 고백을 듣기도 했다. 그 동안 잠복해 있던 게르만 우월주의가 곳곳에서 고개를 쳐드는 소리를 너무나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새로 집권한 정당이 극우 민족주의 정당도 아니었는데 그러했다. 상대적으로 외국인에 대해 덜 우호적이라는 정도의 정치적 변화에도 사회분위기는 돌변하고 있었다. 막강한 정치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70년대 초 우리의 여대생들이 김포공항에서 소복 차림으로 시위를 벌인 적이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일본인 관광객들의 기생관광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한국 여성의 자존심을 지켜보겠다는 여대생들의 안간힘이었다. 이에 대한 당시 주무장관의 태도는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어려울 때 여자 팔아먹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과연 옳은 말이긴 하다. 그게 설사 옳은 말이어도 벌건 대낮에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할 말 안 할 말 가릴 줄 아는 그런 분별력이 바로 염치다. 염치없는 유신정권의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유신정권이 일정한 경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정권의 천박한 몰염치성에 있다.

정치가 염치없어지면 사회는 천박해진다. 요즘의 우리 정치도 과거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특히 최근에는 마치 염치없기 시합이라도 하는 듯하다. 물고 뜯는 발가벗은 권력투쟁 이외에는 정치다운 정치를 찾아볼 수가 없다. 자고 나면 또 무슨 게이트가 유행처럼 터지고 있다. 관련된 것으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전면 부인으로 일관한다. 사실로 밝혀지면 할복자살하겠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는다. 왜 좀 더 당당해질 수 없는지 참으로 답답하고 안쓰럽다. 양심선언을 가장한 각종 게이트의 고발자들도 꼴불견이기는 마찬가지다. 물고 물린 이 부패 사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하나가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물어뜯을 수밖에 없는 처절한 동물적 생존 게임을 보는 것 같다. 때로는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분마저도 없어 보인다. 정말 염치없는 작태들이다.

또 한해가 저문다. 지난 해 이맘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참으로 덧없는 게 세월이라더니 정말 그렇다. 이처럼 덧없는 세월을 살아가는 인생 또한 덧없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정치권력의 쟁취 또는 유지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그토록 사생결단해야 할 일인가. 염치없는 우리 정치인들에게 인간적 연민마저 느낀다.

내년에는 우리 정치판이 최소한의 염치라도 되찾아 주었으면 좋겠다. 설사 속으로는 사생결단을 하더라도 겉으로나마 아닌 척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건 위선이나 가식과는 다르다. 정치인이 성인군자가 될 수는 없을 터, 자기 집 안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야 무슨 해괴망칙한 공상인들 못하겠는가. 그러나 공개적으로는 제발 할 말 안 할 말 가려주었으면 좋겠다. 이 벌건 대낮에 벌어지는 추태들이 내년에는 좀 수그러들기를 기대해 본다.

영남대 교수·경제학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