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 조계종 제10대 종정 혜암(慧菴)스님이 지난해 마지막 날인 12월31일 오전 10시23분 합천 해인사 부속암자 원당암 미소굴(微笑屈)에서 세속 나이 82세, 법랍(法蠟) 55세로 원적(圓寂)했다.
큰스님은 원적 전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我身本非有, 心亦無所住. 鐵牛含月走 石獅大哮吼)라는 열반송(涅槃頌)을 남기고 떠나셨다.
혜암스님은 평생을 청정한 수행자로 살다간 참 선승(禪僧)이었다.일일일식(一日一食·하루 한 끼 먹기) 장좌불와(長坐不臥·잠자리에 눕지 않는 수행)의 모범을 보여 존경 받았다.
1920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27세 때인 1946년 경남 합천 해인사의 인곡스님을 은사로 득도 했다.
본격적인 고행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47년 경북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청담·향곡스님 등과 함께 당시 한국 불교의 중흥을 모색키 위해 4년 결사안거(結社安居·결의를 맺고 특별한 수행에 들어가는 일)를 행한 때 부터다.
스님은 성철스님이 입적한 이후에도 돈오돈수(頓悟頓修·깊고 묘한 진리를 한번에 깨치고 한꺼번에 수행을 성취하는 것)를 지도한 성철스님의 뜻을 쫓아 납자들을 가르쳐왔다.
이후 오대산으로 들어가 잣나무 가루만 먹으면서 참선에 전념하는 등 엄격한 수행을 해오다 성철 방장의 뒤를 이어 해인총림 방장을 역임, 1994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1999년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 됐다.
평소 「가야산 대쪽」이라 불릴 정도로 원칙과 소신이 뚜렸하여 당시 원로회의 의장으로서 조계종 개혁불사와종단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불교계의 정신적 지도자 였던 것이다.
영결식은 오는 6일 오전 11시 해인사 청화당 광장에서 조계종단장으로 거행 후 연화대에서 오후 1시쯤 다비식을 치룰 예정이다.
혜암 종정이 입적한 뒤 해인사에는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스님들과 불자들이 분향소가 마련된 궁현당으로 속속 모여 들고 있다. 조계종은 전국 24개 교구 본사에도 1일부터 분향소를 설치했다.
○…조계종은 종단장 장의위원장에 정대 총무원장, 집행위원장에 해인사 주지 세민스님, 증명에 서옹·월하·서암 전 종정을 추대했다. 해인사 문중 대표로는 전 주지 지관스님, 문도 대표로는 전 주지 성법스님(맏상좌)을 정하고 장의 준비에 들어갔다.
○…스님의 원적 다음날인 1일엔 해인사에 8천여명의 인파가 몰렸으며 3천여명의 승려.불자들이 분향소를 참배했다. 또 밤늦은 시간에도 외지 참배객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가야산 자락엔 독경소리가 가득했다.
분향소가 마련된 궁현당 앞 뜰에는 문중.문도.일반단체는 물론 각 정당 대표, 국회 연등회 등 각계에서 보낸 대형 화환 80여개가 진열돼 있었다.
○…경찰은 1993년 성철스님 입적 때 겪은 교통대란이 재발하지 않도록 1일부터 경찰력을 해인사 지역에 집중 배치했다. 영결식 당일에는 3만∼5만명의 추모객들이 몰릴 것으로 보고 일반 차량은 통제하고 셔틀버스 7대를 왕복운행토록 했다.
○…맏상좌인 전 주지 성법스님(진주 호국사 주지) 등 혜암스님 문도들은 큰스님 입적 소식을 듣고 속속 해인사로 모였으며. 일체 외부 출입을 삼간 채 1일부터 영결식 때까지 매일 오후 기도회를 열고 있다.
합천.정광효기자 khje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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