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노자의 교훈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는 중국사상의 겉과 속이다.

공자(孔子)로 대표되는 유가가 현실적이라면, 노자(老子)의 도가는 초현실적이다.

공자가 현실사회를 예(禮)의 제도로서 다스리려 한데 비해, 노자는 도(道)라는 절대적 원리로 그것을 대신하려 했다.

노자의 도는 알려진 대로 우주론적 개념일 뿐 아니라, 정치사상의 기본개념이다.

도는 자연의 질서이지만, 인간이 따라야 할 삶의 실천적 규율이기도 한 것이다.

그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인위의 무리를 가하지 말고 필수적이고 자연적인 일만 행하며, 덕(德)을 그 실천방안으로 해야 한다고 믿는다.

노자는 현실사회가 안정되지 못하고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이성을 바탕으로 자기중심의 판단을 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통치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것 역시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법률을 번잡하게 늘려 국가권력을 남용하거나, 국가기구가 팽창되는 것을 반대했다.

백성과 군주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보다 무위(無爲) 속에 있기를 희망한 것이다.

노자의 이상은 '자꾸 덜어내는(損之又損)' 정치를 하여 국가기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가 되도록 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최상의 정치는 군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단계, 그 다음은 군주를 친근하게 여기며 칭송하는 단계, 그 다음은 두려워하는 단계, 그 다음은 경멸하는 단계(太上不知有之 其次親而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라 설파했다.

이런 도의 통치를 위해 노자는 욕구를 통제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물론 인간의 욕망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기호만을 만족시킴으로써 인간의 욕망 확산을 자제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는 문명화된 욕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래 난세(亂世)의 파열음이 잇따르고 있다.

자고 나면 새로운 일이 터지고, 눈을 뜨면 뭔가 벌어진다.

검찰인사 파문, 이라크전 파병 갈등, 철도파업, 화물연대 파업, NEIS를 둘러싼 전교조.반전교조의 격돌, 새만금 갈등, 한총련 합법화 갈등, 국정원장 임명 파동, 조흥은행 파업, 특검 수사연장 갈등, 경제 5단체 성명에 이르기까지 혼란의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까지 시위에 나서는 마당이니 나라가 조용하기는 어차피 틀린 일이다.

대통령이 만들어내는 혼란들도 그에 못지 않다.

주한미군 관련 발언, 신문과의 잇따른 갈등, 현충일 일본 방문, 공산당 허용 발언, 노위병(盧衛兵) 발언 등등. 여당인 민주당마저 신당 창당을 둘러싼 집안싸움으로 첩첩산중을 헤매고 있다.

새 정부 100여일 동안 단 하루의 영일(寧日)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쿠데타가 몇 번이라도 일어났어야 할 상황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나라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하 답답해 노자의 교훈을 되짚어보게 된다.

우리 사회의 위기의 원인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의 결핍과 문화적 퇴행이 그것이다.

우리의 사회병 중 많은 부분은 금욕주의적 도덕관이 욕구충족의 물질관으로 전환된 데 따른 현상으로 이해된다.

인간욕구에는 한계가 없다.

욕구를 관리하지 않고,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려 들면 불만과 갈등은 계속 늘어나게 된다.

파업의 절반쯤은 그 원인이 여기에 있다.

생존과 생계를 위한 몸부림이기보다는 더 갖고, 더 누리겠다는 욕구가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문화적 퇴행으로 합리적 판단보다 호오(好惡)의 감정이 중시되고, 실체가 불분명한 이념에 경도되는 사회 풍조 역시 혼란의 원인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호오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편협성을 띠는 호오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잣대가 돼서는 곤란하다.

거기에 요상한 이념까지 덧칠되면 더더욱 복잡해진다.

요즘 우리사회에 회자되는 코드는 결국 정체불명의 이념에 호오까지 보태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추상적 정서에 기반한 논란에는 처방도 없다.

그것은 건전한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최근 사회 문제의 다수에는 이 같은 뒤틀린 정서가 공통분모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노자의 고사에 빗대보면 통치술은 이런 때 필요한 것이다.

국민들의 욕구를 줄이고, 덜어내는 정치를 통해 사회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정권은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걸어온 느낌이다.

욕구의 확대 재분배로 관리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파업.시위만 하면 보상을 던져주니 불법 외국인 노동자까지 설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법과 원칙을 지켜 정치색을 줄이려 들지 않고, 자의적인 개입을 늘려 세상을 더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

개혁을 위한 각종 인위적 행위도 정치를 더는 게 아니라 보태는 이유다.

정부가 관련된 인사파동은 거의가 자연스럽지 못한 인선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말썽이 따르는 인선을 밀어붙인 탓이다.

상식에 벗어나는 대통령의 문제 발언들도 정치를 보태는 이유의 하나다.

대통령이 보편타당한 시각과 가치의 중심에 서지 못해 일어나는 잡음들인 것이다.

개꼬리로 몸통을 흔들려니 반발이 없을 수 없고, 반발이 생기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세(勢)가 부족할수록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도 말이다.

노자가 말한 4단계의 정치 중 우리는 지금 몇 단계에 와 있는 것일까.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판이니 답은 절로 얻어진다.

그나마 근간에 대통령이 통치의 본질에 접근하는 듯한 몇몇 언급들을 던지고 있어 불행 중 다행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불안감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다.

언론의 비판을 새디즘으로 치부하는 듯한 시각을 노출시켜서는 안된다.

언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대통령 이야기가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면 "1년을 배워도 4년이 남는다"와 같은 태평스런 발언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이 1년을 연습 할 동안 나라가 와해 될 수도 있다.

1년을 망치면 나머지 4년도 없다는 각오로 국정에 임해야 할 마당이다.

노자의 옛 지혜가 새삼 마음을 두드리는 시국이다.

박진용(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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