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세모(歲暮) 일기

누구나 한 해가 저물 때쯤이면 일년 동안 쓰던 수첩과 일기장을 정리하는데, 나 역시 버릇처럼 이 일을 하고 있다.

반질반질 손때가 묻은 수첩과 두툼한 일기장은 한 해의 일을 기록한 내 개인의 역사서이다.

그러므로 한 해 동안 나의 행적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타임 캡술'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서류를 정리할 때마다 느끼는 감회는 참 분주하게 살았다는 부끄러움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한 사람의 수행자가 남기는 흔적 치고는 너무 번거롭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구도와 참회의 시간보다는 자질구레한 세속 일에 연연한 시간이 더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출가의 본분에서는 영점짜리 삶을 산 것이나 다름없다.

출가인은 황금 만냥을 쓰는 삶이라고 한다.

그만큼 하루하루를 귀하고 소중하게 쓰라는 뜻일 텐데,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온전한 나의 시간으로 만들었는지 물어본다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타성에 젖어 사는 삶은 허수아비와 같고, 남의 인생을 모방하는 것은 원숭이와 같다.

지난 한 해의 내 삶이 그렇다.

참 분주하게 살았지만 마음 챙기는 수행은 멀리하고 무상한 세속 일에 동화되어 흥청망청 시간을 허비하고 지냈다.

하루해가 저물면 다리를 뻗고 울었다는 어느 노스님의 일화가 생각난다.<

마음공부는 거북이 걸음처럼 느릿느릿한데, 세월은 토끼걸음처럼 무상하고 신속하다.

그래서 헛되이 낭비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자책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노스님의 자세가 하루에 황금 만냥을 쓰는 수행인의 올바른 삶일 것이다.

수행자는 무엇보다 단순해야 한다.

단순하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을 줄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일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닌데도 그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고민하는 일이 참 많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은 이러한 비본질적이고 불필요한 일들로 인해 분주하게 하루를 살고 있다.

특히 심리적으로 분주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어쩌다 한가한 시간이 주어지면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사람들은 바쁘게 살면서도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수첩과 일기장을 정리할 때마다 인연의 부피에 놀라게 된다.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삶의 위안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또 하나의 관계'를 형성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삶의 네트워크가 더 복잡하고 용량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들어진 관계와 일로 인해 본성은 점점 매몰되어가고 명상과 휴식의 뜰이 날로 줄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살펴보라,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관계'들이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언젠가 지인(知人)들의 연락처를 적은 작은 수첩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얼만 동안은 참 불편하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홀가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타성적 관계 속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을 겪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닌 것은 조금 불편할 뿐, 삶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필요한 인연과 일은 삶의 둘레에서 지울 수 있어야 내가 먼저 홀가분해진다는 메시지다.

세모(歲暮)의 등성이에서 한 해를 돌아보면 계획대로 이루어진 일보다 놓친 일들이 더 많다.

정확히 말하면 게을러서 포기했거나 미루어 둔 일들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우리 인간들의 습관은 저 히말라야에 산다는 '야명조(夜鳴鳥)'와 다를 바 없다

이 새는 밤이 되면 혹독한 추위를 이기지 못해 내일은 꼭 집을 짓겠다고 수십 번 다짐한다.

그렇지만 날이 밝고 햇살이 따스해지면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다시 밤이 되면, 또 추위에 떨면서 똑 같은 다짐을 되풀이 한다고 한다.

사람들도 위기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새로운 삶을 맹세하지만 그 상황이 해결되고 나면 그 일을 금세 잊고 사는 것을 보면, 모양은 다르지만 어리석음의 형태는 똑 같은 것 같다.

한 해가 또 저물어 간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시간은 늘 아쉽고 꿈결 같다.

그렇지만 세월의 중심에 서서 시간을 주체적으로 이끌었다면, 하루하루를 값지고 소중하게 살았다고 개인사(個人史)에 기록하여도 그다지 큰 허물은 되지 않으리라.

현진(스님.해인사 포교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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