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이럴 때면 늘 소백산(1439.5m)이 떠올랐다. 능선에 초록 양탄자를 깔아놓고 군데군데 철쭉 군락으로 한껏 치장한 모습. 이즈음 떠오르는 소백산의 모습이다. 당일 산행도 가능하지만, 유일한 대피소인 제2연화봉대피소에서 하루 쉬어가며 1박2일로 여유 있게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연분홍 철쭉 가득한 초록 능선을 걷는 상상을 하며 지난달 30일 소백산으로 향했다.
◆제2연화봉에서 만난 붉은 해넘이
소백산은 이름에 소(小)자가 들어가는 바람에 왠지 작고 만만한 산으로 느껴지지만, 품이 넓고 큰 산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선 하나를 꼽으라면 소백산을 언급하는 이들도 많다.
특히 1300~1400m 높이의 연화봉~비로봉~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은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아고산(亞高山) 지대로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순하고 부드러운 능선은 봄·여름·가을이면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고,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쌓여 환상적인 설경을 연출한다. 등산객들은 이 능선을 중심으로 계절과 산행 능력에 따라 적절하게 코스를 잡는다.
소백산을 대표하는 수종인 철쭉도 이 구간에 골고루 퍼져 있다. 지금이야 보성 일림산, 남원 바래봉, 산청 황매산, 남양주 축령산 등 전국적으로 철쭉 명산이 이름을 날리지만 예전에는 지리산 세석과 더불어 소백산 철쭉을 최고로 꼽았다. 소백산 철쭉은 개화 시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워낙 바람이 드센 아고산(亞高山) 지대에서 살아남으려는 생존 전략이다. 이런 이유로 소백산에 여러 번 가도 철쭉 구경을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죽령 탐방지원센터을 출발해 제2연화봉~연화봉~제1연화봉을 거쳐 정상인 비로봉에 오른 뒤 어의곡 탐방지원센터로 하산하는 코스로 일정을 잡았다. 소백산 등산로의 고전으로 꼽히는 희방사를 들머리로 잡을까도 생각했지만, 제2연화봉에 있는 대피소를 이용하기로 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오후 3시쯤 죽령(689m)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산행을 시작한다. 대피소가 있는 제2연화봉까지 4.3㎞ 구간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깔려 있다. 제2연화봉과 연화봉에 각각 있는 강우레이더관측소와 천문대 관리를 위한 임도다. 이런 이유로 희방사에서 오르는 길과 비교하면 걷는 맛이 한참 떨어진다.
조망이 없는 지루한 길을 따라 땀을 흘리며 1시간 30여 분만에 제2연화봉에 도착한다. 드디어 시야가 탁 트인다. 전망대에서 다음날 오를 연화봉~제1연화봉~비로봉 능선을 눈에 담는다.
제2연화봉 대피소는 해넘이 명소로 유명하다. 대피소에 짐을 풀고 이른 저녁식사를 한 뒤 일몰을 맞기 위해 대피소 앞마당으로 향했다. 보온 의류를 입었지만 서늘한 기운에 금세 소름이 돋는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했다. 태양은 하늘을 점점 붉게 물들였다. 켜켜이 쌓인 산들의 산그리메가 드러났다. 여기저기서 '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내 붉은 빛이 사라지고 풍기읍의 불빛이 반짝였다.
◆초록빛 양탄자 깔아놓은 듯 부드러운 능선길
이튿날, 오전 5시쯤 산행에 나섰다. 멀리 소백산천문대를 바라보며 1시간여를 올라 다다른 연화봉 자락엔 철쭉꽃이 이미 떨어지고 난 뒤였다. 대피소 예약 문제로 일정을 한 주 미뤘던 탓에, 예상은 했었지만 가슴 한 구석엔 아쉬움이 남았다.
나무 데크로 말끔하게 꾸민 연화봉 전망대에 섰다. 아쉬운 마음을 위로라도 해주듯 청명한 날씨가 제1연화봉~비로봉~국망봉으로 이어진 선명한 초록 능선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어느 능선이 이곳처럼 부드러울까. 반대편으로는 소백산 천문대 너머로 월악산 영봉이 엄지손가락처럼 튀어나왔다.
연화봉에서 비로봉까지는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여러 봉우리를 넘는다. 나무가 거의 없는 능선 길은 진한 초록빛을 머금고 넘실거린다. '한국의 알프스'라는 수식어가 딱 들어맞는 풍경이다.
제1연화봉에서 봉우리 두 개를 더 넘으면 천동계곡이 갈리는 삼거리다. 여기서 비로봉을 바라보면 드넓은 품 안에 주목이 가득하다. 주목 군락지를 지나면 펑퍼짐하고 후덕한 모습을 한 비로봉이 지척이다. 정상엔 수많은 등산객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딛다 보니 어느새 비로봉 정상. 눈부시게 맑은 빛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정상 조망은 거칠 것이 없다. 도솔봉에서 흘러와 소백산 주능선을 거쳐 선달산으로 흘러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선명하다. 남쪽으로는 풍기와 영주 시가지가 한눈에 잡힌다.
하산은 비로봉에서 국망봉 쪽으로 가다 나오는 어의곡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난 길을 따른다.
하산 길 국망봉과 그 뒤로 이어진 백두대간 줄기를 바라본다. 약 1100년 전 국망봉에 올라 남쪽의 고국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을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떠올랐다. 500년 전 따듯한 봄날에 국망봉에 올라 봄 풍경을 만끽하며 글을 썼던 사람도 있었다. 풍기군수였던 퇴계 이황이다. 그는 철쭉의 세계에 감탄하며 "비단 속을 거니는 듯, 호화로운 잔치에 온 기분"이라고 했고, 세찬 바람에 마구 휘어진 나무들을 보며 "나무들이 전쟁을 대비하는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이런 저런 생각을 잠겨 숲길을 걷다보니 기다란 데크계단과 돌계단이 이어진다. 절반쯤 내려온 셈이다. 천천히 내려서야 하는 가파른 하산 길에서 휙휙 뛰어가는 사람도 있고, 축 늘어져 힘겹게 걷는 사람도 있다. 졸졸졸 물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계곡을 만나 길은 넓어지고 편해진다. 비로봉에서 두 시간쯤 걸어 어의곡 새밭마을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머리와 가슴은 확실히 가벼워졌는데, 무릎과 발목은 후끈거린다.
◆산행정보
소백산 산행은 국립공원공단이 소개하는 코스에서 하산길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산행 코스를 만들 수 있다.
죽계구곡 초암사 코스나 희방, 삼가 등 영주 방면을 들머리로 삼는 게 일반적이다가 점차 단양 방면 코스도 인기가 높아지게 됐다.
최근엔 100대 명산 등 정상 인증을 중시하는 산행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최단코스'의 인기가 높다. 어의곡, 천동탐방지원센터에서 비로봉만 올랐다가 내려가는 것. 다만 이 경우 소백산의 백미인 능선종주를 티끌만큼만 하게 된다.
소백산 능선을 만끽하기 위해 죽령을 들머리로 잡았다면 제2연화봉대피소를 활용해 1박2일로 종주하면 초보자도 큰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대피소엔 전자레인지, 충전기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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