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개혁(2)-악역 자청한 태종

*세종 업적의 반은 태종 것

정치인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위인은 아마 세종대왕일 것이다.

모든 정치가들, 특히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세종대왕과 같은 업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세종이 그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데는 태종이란 악역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유념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의 일단이 여기에 있다.

태종이 없었어도 세종이 그런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태종이 악역을 자청하지 않았다면 세종은 역사서에 기록된 것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 업적의 반은 태종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신집단의 음과 양

세종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했던 태종의 악역이란 다름 아닌 동지들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즉 공신 숙청이 태종의 악역이었다

오랜 군사독재의 유산 때문에 우리 사회는 공신이란 용어에 부정적이지만 모든 공신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불법과 전횡을 일삼는 공신이 아니라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고 그를 실천함으로써 새 시대를 연 정치세력은 포상받아 마땅하다.

조선의 개국공신도 성리학이라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던 정치이념과 자영농의 생활안정이라는 경제토대의 국가를 개창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조선 개창 직후인 태조 1년(1392)에 책봉된 52명의 개국공신들은 개경의 왕륜동(王輪洞)에서 회맹(會盟)했다.

희생(犧牲)을 잡아 그 피를 나누어 마시거나 입가에 바르면서 영원한 동지가 될 것을 맹세하는 의식이다.

회맹에는 세자 방석과 방원(훗날의 태종)은 물론 정도전, 남은 등이 함께 해 "무릇 우리들 일을 같이한 사람들은 각기 마땅히 임금을 성심으로 섬기고, 친구를 신의로 사귀고, 부귀를 다투어 서로 해치지 말며, 이익을 다투어 서로 꺼리지 말며, 다른 사람의 이간하는 말로 생각을 움직이지 말며… 우리의 자손에게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 맹약을 지킬 것이니, 혹시 변함이 있으면 신(神)이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태조실록'1년 9월 28일)"라는 회맹문을 발표해 결속을 과시했다.

*왕자의 난에 대한 민씨 형제들의 공로

그러나 자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지키겠다던 맹약은 불과 6년만인 태조 7년(1398) 개국공신들이 서로 창칼을 휘두르며 시가전을 전개하는 것으로 무효가 되었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인데, 여기에서 승리한 태조의 5남 방원이 실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그가 승리한 배경에는 처가 민씨 일가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었다.

망설이는 방원에게 거사를 종용한 당사자가 부인 민씨였으며 두 남동생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은 창칼을 들고 직접 싸웠는데 이런 사정은 태종의 시각에서 기록한 '태조실록'에도 나와 있다.

"이때(왕자의 난 당일)에 이르러 민무구, 민무질과 더불어 모두 모였으나, 기병(騎兵)은 겨우 10명뿐이고 보졸(步卒)은 겨우 9명뿐이었다.

이에 부인(민씨)이 준비해 둔 철창(鐵槍)을 내어 그 절반을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러 왕자의 종자(從者)들과 각 사람의 노복(奴僕)이 10여 명인데 모두 막대기를 쥐었으나 소근만은 칼을 쥐었다.

('태조실록' 7년 8월 26일)"

1차 왕자의 난에서 패배한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심효생 등과 함께 세자 방석 형제와 그 누이 경순공주 부부도 죽고 말았다.

이들의 죽음 위에 29명의 정사(定社)공신이 책봉되었는데, 민무구·민무질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1차 왕자의 난이 이복형제들끼리의 골육상쟁이라면 2년 후인 1401년 1월 발생한 2차 왕자의 난은 동복형제들끼리의 골육상쟁이었다.

이때도 민무구·무질은 사병을 끌고 매형을 도와 방원이 승리하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올랐던 허세(虛勢) 정종은 2차 왕자의 난 다음달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는 형식으로 실세(實勢) 방원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11월에는 왕위마저 물려주었다.

46명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다시 책봉되는데 민무구·무질은 모두 9명뿐이던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다른 1등 공신인 하륜, 이숙번 등도 민씨 친정과 직·간접적인 관련 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방원 즉위의 절반 이상은 민씨 부인과 그 친정 덕분이었다.

정사·좌명공신들도 태종에게는 동지요 동업자였지만 그 처남 민무구·무질은 여기에 혼연(婚緣)까지 가미된 동지 중의 동지였다.

*태종 앞에 놓인 두 가지 선택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명분은 역설적으로 '왕권강화'였다.

그러나 막상 즉위한 태종이 왕권강화라는 개혁목표를 실천하려 하자 공신들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1·2차 왕자의 난으로 탄생한 태종의 동지·동업자들은 법위에 군림하는 존재들로서 태종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좌명 1등공신 이숙번(李叔蕃)은 계급이 같은 재상을 하인만도 못하게 여겼으며 주요 요직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워 넣었고, 돈의문 안에다 거대한 저택을 짓고는 오가는 행인들의 소리가 듣기 싫다고 돈의문을 막아 버릴 정도로 전횡을 일삼았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이때 태종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동지·동업자들과 함께 국가 권력을 나누어 가지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신들을 숙청해 쿠데타 명분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태종이 첫 번째 길을 선택했다면 그는 정권을 잡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폭군 정도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공신 숙청이라는 두 번째 길을 선택함으로써 1.2차 왕자의 난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했는데, 그 과정은 피로 점철된 비극의 연속이었다.

태종은 이숙번에게 곤장을 친 후 함양 별장으로 귀양 보내고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나아가 태종은 자신들의 처남에게까지 숙청의 칼날을 들이댔다.

*처남들을 숙청하다

그 계기는 하찮은 것이었다.

태종은 재위 6년(1406) 자신의 덕이 부족해 나라에 재변(災變)이 끊이지 않는다며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다.

신하들은 정청을 열어 이 명의 환수를 요청했고 태종은 못이기는 척 양위를 거두었는데, 이 양위소동이 이듬해 민무구·무질 형제에 대한 공격 자료로 전환된 것이다.

태종 7년 태조의 이복동생인 영의정부사 이화(李和)가 태종이 선위 계획을 발표했을 때 민무구·무질 형제는 슬퍼하는 대신 '화색'을 띠었고 태종이 선위 계획을 포기하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고 공격했다.

어린 세자를 끼고 정권을 잡으려 했다는 이른바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였다.

그러나 '화색'이니 '불쾌한 기색'이니 하는 것들은 보는 시각에 따른 문제일 뿐 구체적 물증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태종은 민씨 형제의 공신첩과 직첩을 빼앗고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그리고 재위 10년 두 형제를 사사(賜死)시켜 버렸다.

매형을 위해 두 번씩이나 목숨 걸고 시가전을 벌인 대가가 사형으로 돌아온 것이다.

태종은 사건 직후 외척경계론을 담은 교지를 발표했고 왕비 민씨도 폐비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세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겨우 무사했다.

그러나 태종의 외척공신 숙청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민무구·무질의 두 동생이었던 민무휼(閔無恤)·무회(無悔)에게 과녁이 옮겨졌다.

두 형제는 태종 14년(1414)에 원경왕후 민씨의 문병을 위해 궁궐에 들렀다가 세자 양녕에게 '두 형(무구·무질)이 어찌 모반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라며 '세자께서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자라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는데, 1년 후 세자 양녕이 이를 폭로하면서 두 형제는 직첩을 빼앗기고 각각 원주와 청주로 귀양가야 했다.

대간에서는 두 형제가 태종에게 불경죄를 저지른 것이라며 연일 사형을 요구했는데, 이에 경악한 왕비 민씨는 식음을 전폐했고, 이들의 노모 송씨 역시 드러눕는 것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태종 16년 10월 민무휼과 민무회는 유배지에서 자진(自盡:자살)해야 했다.

말이 자진이지 태종이 의금부도사를 원주와 청주로 보내고 수령에게 "굳게 지켜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만약 자진하고자 하거든 금하지 말라"는 전지(傳旨)를 내린 끝에 죽은 사실상 타살이었다.

온 집안이 나서서 방원을 임금으로 만든 결과가 4형제의 비참한 죽음이었던 것이다.

*피의 숙청 위에 핀 조선 르네상스

태종의 즉위에 목숨을 걸었던, 그래서 집권 후 권력을 나누기를 바랐던 공신들로서는 억울했겠지만 태종이 이런 냉혹한 길을 걷지 않았다면 세종이 아무리 뛰어난 재질을 지녔더라도 별다른 업적을 남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태종이 동지·동업자들과 함께 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세종은 부왕의 동지들 뒤치다꺼리나 하거나 혹은 이들과 싸우느라 다른 일은 돌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종이 세간의 악평을 무릅쓰면서 공신집단을 해체시켰기 때문에 세종은 안정된 왕권 위에서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난마처럼 얽혀있는 현 위기를 딛고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정치가는 태종같은 냉혹함으로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요소에 과감하게 칼을 대는 인물일 것이다.

내 쪽의 잘못은 눈감고 상대방의 잘못에만 목청높이는 식으로는 갈등만 조장될 뿐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부패한 정치권, 불투명하고 족벌화된 기업의 경영관행, 경직되고 이념화된 노동시장, 집단 이기주의 등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모든 공신(?)들을 숙청하고 난 후 우리 사회는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은 대통령이 세종을 꿈꾸다 만신창이가 된 후에야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정치가는 세종이 아니라 악역을 담당할 태종이라는 사실을 깨닫겠는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옥사

세종의 장인 심온은 세종 즉위년(1418) 사위의 즉위를 알리기 위한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는데, 이때 그를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던 것이 외척발호를 경계하는 상왕 태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태종은 심온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의 사후 세종이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태종은 심온의 동생 심정이 임금의 호위군사를 배치하면서 세종에게만 보고하고 자신에게는 보고하지 않은 일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여기 연루시켜 심온까지 죽여 버렸다.

명목상의 임금이었던 세종은 자신의 장인 형제가 사형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으나 이는 훗날 세종의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