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슬로라이프-(4)슬로 페이스

구영수(57) 대구시 환경정책과장은 1주일에 3, 4차례를 자가용이나 버스를 타지않고 걸어서 달서구 용산동 집까지 간다.

도보로 집에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40분. "천천히 걸으면서 세상 구경을 합니다.

서문시장을 지나면서 여러가지 물건도 둘러보고 국수도 사먹고, 대구의료원 주변 공원에서는 가볍게 맨손체조를 합니다.

100분 동안 나만의 세상사는 즐거움을 만끽하지요".

"세상구경…얻는 게 많아"

그가 걸어서 귀가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0년부터. "담배를 끊었는데 몸무게가 늘더군요. 따로 운동을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 퇴근길에 걸어서 집까지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집이 수성구 수성동에 있을 무렵엔 1년내내 신천둔치를 걸어 출.퇴근했고 대명동, 용산동으로 집을 옮기면서도 도보로 귀가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두 시간 가까이 걸어 집에 가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나면 온 몸이 개운해지고, 마음이 맑아져요. 걷는 동안 스트레스가 말끔하게 없어집니다". 구 과장은 "버스를 타는 것과 비교하면 걸어서 귀가하는 것이 1시간 정도 더 걸리지만 걸으면서 얻는 게 너무 많아 주변 사람들에게 걷기를 권유하고 있다"고 했다.

출발한 지 몇 초만에 시속 100㎞에 도달한다는 자동차 광고가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이 시대에 걸어서 귀가하는 구 과장의 얘기는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빠름을 찬양.추종하고 있지만 그 반대편에는 느림을 추구함으로써 질적으로 높은 삶을 얻으려는 움직임도 분명히 있다.

틱낫한 스님도 걷기명상

자동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슬로 페이스(Slow Face). 시간의 굴레에 얽매여 살기 보단 인생의 속도를 스스로 컨트롤하겠다는 생각에서 슬로 페이스를 실천, 느리지만 풍족한 삶을 살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걷기, 자전거타기 등은 우리의 인생을 느리게 만들어주고, 주변을 돌아보게 하며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구 과장처럼 걷기가 가져다 주는 '매력'에 빠져 출.퇴근 시간에 서너 정거장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짬을 내 국채보상기념공원이나 경상감영공원에서 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철학자 피에르 쌍소도 걷기를 느림의 실천 덕목 중 하나로 꼽았다.

"출근길에 길에 핀 꽃이며 하늘의 구름을 보느라 걸음이 늦어져 수업시간을 못맞출 때가 많았지요. 그렇게 걷는 시골길이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었답니다". '화' '힘' 등으로 유명한 틱낫한 스님은 '걷기명상'을 수행법의 하나로 삼고 있다.

슬로 페이스 확산에 자전거 붐도 빼놓을 수 없다.

1996년 대구에서 몇몇 회원이 발족한 '자전거타기운동연합'은 현재 대구에만 회원수가 2천명에 가깝고, 전국적으로는 2만명을 넘었다.

김종석(46) 자전거타기운동연합 대구본부장은 "교통.환경.경제적 측면을 넘어 자전거는 우리의 삶을 느리게 만들어주고, 되돌아보게 하는 존재"라며 "10대부터 60~70대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고 했다.

대구시 동구 신암동 집과 남산동에 있는 직장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김 본부장은 "자전거를 타면 세상 구석구석을 볼 수 있어 좋다"고 자랑했다.

'자전거 전도사'로 유명한 박찬석(64) 경북대 교수는 "자전거를 타야 아름다운 문화와 산과 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시속 16㎞ 일본 느림보 버스

일본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는 지난 해부터 '느림보 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이 버스의 주행속도는 시속 16㎞로 보통 시내버스의 절반 또는 3분의 1 수준이다.

2002년에는 30㎞의 거리를 4~5시간 동안 달리는 슬로 사이클링 대회를 열기도 한 가케가와시의 슬로 페이스에 대한 철학은 확고하다.

"21세기는 물질적 풍요는 있지만 정신적 빈곤은 심화되고 있어요. 슬로 라이프를 실천함으로써 마음의 풍요로움을 얻고 나눌 수 있습니다". "가장 빠른 자가 되려는 사람은 결국 성급함 때문에 죽게 된다"는 철학자 칼하인츠 가이슬러의 얘기를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은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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