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의 보급과 경제적 통합의 가속화로 세계는 점차 보편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중국산 의류를 입고 남미산 과일을 소비하며 유럽산 주방용품을 사용하는 것이 일상이 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정치경제분야에서 두드러지고 있는 이런 보편화의 추세와는 달리 문화의 영역에서는 갈수록 고유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어느 한 민족이 지닌 고유한 문화자산은 그 민족의 정신적 역량이자 국가경쟁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조상으로부터 풍부하고 우수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우리는 복 받은 후손인 셈이다.
하지만 정작 그런 소중한 문화유산이 보존되고 있는 현실을 들여다보면 안타까움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선현들의 정신가치가 담긴 기록유산인 고전적(古典籍)과 고문서 등의 관리실태가 그러하다.
조선시대는 민간차원의 자율적 지식생산 활동이 두드러졌던 시기이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자신이 몸담은 향촌에서 유학(儒學) 이념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40여만 권으로 추산되는 방대한 양의 전적들을 남겼다.
그 속에는 당시 시대이념의 현실적 구현양상이 그대로 담겨있고 지방문화의 다양한 모습들이 반영되어 있어서 조선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들이다.
그러한 정신문화유산 중 다수가 이미 일실(逸失)되었거나 서원과 향교, 개인에게로 흩어져 공개가 기피된 채 도난과 훼손, 멸실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관찬(官撰) 자료 중심의 기록문화재들이 정부의 관심과 재정적 지원 아래 규장각 등의 공공시설에서 과학적으로 보존되고 연구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새해 들어서만도 군산시에서 한말의 학자 전우(田愚;1841~1922)의 문집을 포함한 93책이 도난당했고, 영천시에서도 무신 권응수(權應銖;1546~1608) 장군의 유물인 〈가전보첩(家傳寶帖)〉 2책(보물 668호)이 도난당한 바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민간소장 기록문화재들이 관리소홀로 인해 심각한 훼손위기에 처해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흩어진 것은 언젠가 다시 찾아 모을 수 있겠지만 관리상의 문제로 변질, 훼손될 경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정부는 개별 소장처 대상의 유물관 건립지원을 통한 분산관리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건립된 다수 문중(門中) 유물관의 운영현황이 말해주듯이 현행의 소규모 분산관리 방식으로는 유물의 도난은 간신히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과학적 보존이나 체계적인 연구까지는 기대하기 어렵다.
종이류가 대부분인 기록문화재는 항온항습(恒溫恒濕)의 과학적 보존과 충해관련 방제(防除) 관리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개별유물관들은 이러한 설비를 갖추고 관리비를 부담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화유산, 특히 기록문화재는 잘 보존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연구의 자료가 되어야 하고, 나아가 모든 이들이 보고 느끼는 문화적 향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골동품적 가치를 넘어 이 시대 우리들과 소통하는 유의미한 정신적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자체 연구인력이 없는 소규모 유물관은 체계적인 연구나 전시와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의 분산관리 방식은 재고되는 것이 마땅하다.
비용대비 효율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소수의 유력문중만이 혜택을 볼 뿐 전반적인 대책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소규모 분산관리 방식을 대체할 새로운 관리방안을 찾아야 한다.
민간소장 국학자료의 위탁보관사업을 시행해온 한국국학진흥원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최선의 방안은 과학적인 수장(收藏) 시설과 관리시스템 그리고 연구진을 갖춘 공공기관에 위탁해 집중관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기관을 설립할 필요는 없다.
지방에 있는 기존의 국학관련 연구기관이나 박물관 등을 활용해서 집중보관 시설을 갖추고 그 지역의 자료들을 위탁받아 관리하도록 하면 된다.
이러한 기관들끼리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토록 하여 자료를 상호교환하고 공동으로 활용하게 하면 국학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유산의 훼손과 멸실은 한 개인의 손실이 아니라 민족문화의 손실이다.
민간소장 자료가 처한 현재의 위기상황에 비추어볼 때, 적절한 보존관리 대책은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과제이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위기상황에 대한 인식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효과적인 집중관리를 위한 정책적 지원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심우영(한국국학진흥원장.전 총무처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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