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대가야-(37)고구려왕과 대가야

400년, 고구려는 신라에 군사 5만을 보내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까지 추격, 왜(倭)를 쫓아냈다.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 집권 10년 때 벌인 전쟁이다.

여기서 임나가라는 김해 금관가야로 추정된다.

신라는 자신의 영역에 백제와 가까운 왜, 가야세력이 자주 침범하자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던 것.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후원을 입고 있었고, 백제-왜-가야제국은 연합 또는 동맹관계였다.

광개토왕 비문에 나타난 이 내용은 고구려가 가야의 영역을 침공했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481년 3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신라 북쪽 변경에 침입해 일곱 성을 빼앗고, 다시 남쪽으로 진군하자 가야와 백제가 연합해 길을 막았다.

당시 백제와 연합한 가야세력의 주축은 고령 대가야로 추정된다.

가야와 백제는 고구려 군이 달아나자 니하(泥河)의 서쪽에서 천여 급을 목베고 신라를 구원했다.

광개토왕의 맏아들인 20대 장수왕이 집권한 지 68년만의 일로,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록이다.

신라는 400년 고구려의 지원을 받다 81년 뒤 고구려와 적대관계로 돌아선 대신 이전 적국이었던 백제-가야 연합세력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오늘의 동맹국이 내일은 적대국이 되는 냉혹한 현대 국제관계와 다를 바 없었다.

금관가야, 대가야와 차례로 일전을 펼쳤던 고구려의 두 왕을 찾았다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대구에서 비행기로 랴오닝(遼寧)성 선양(沈陽), 다시 택시를 타고 지린성 통화(通化)시를 거쳐 북으로 6시간 넘게 달리자 지안시를 알리는 팻말이 나왔다.

흰 눈이 채 녹지 않은 험한 산길을 돌아서니 오른쪽으로 다섯 산봉우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택시기사는 "여성의 몸매와 얼굴을 빼 닮았다고 '오녀봉(五女峯)'으로 부른다"고 했다.

장군총(장수왕 무덤으로 추정)을 쌓은 거대한 바위들은 바로 오녀봉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오녀봉을 비껴 노령고개를 넘어서자 드디어 지안평야가 펼쳐졌다.

고구려의 400년 고도 국내성(國內城;3~427년)이었다.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발원,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이루며 서남쪽으로 흐르는 압록강과 맞닿은 지역이다.

지안 시정부가 있는 중심부에서 삼륜차를 타고 약 3km쯤 동북쪽으로 달리자 언덕배기에 '태왕릉'(광개토왕 무덤으로 추정)이 장엄한 위용을 드러냈다.

비록 왕릉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20m 간격으로 감시카메라를 달아놓았지만 무덤 속 주인공이 고대 중국의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한 중국 정부의 과잉보호가 더 이상의 유적훼손을 막는데는 잘 된 일일 터. 태왕릉 주변에서는 '원컨대 태왕의 무덤이 뫼처럼 안전하고 큰산처럼 견고하기를'이란 글귀를 새긴 벽돌이 발견되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글귀 속의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었다.

태왕릉에서 다시 눈길을 동북쪽으로 돌리자 바로 300m 거리에 방탄유리와 감시견, 공안요원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광개토왕비'가 보였다.

장수왕이 414년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각의 사방을 호위하는 감시견 네 마리는 먼 길을 달려온 대가야의 후손을 반기듯 쉼 없이 짖어댔다.

400년 신라의 땅에서 왜를 쫓아내고, 다시 가야의 땅까지 치고 내려간 바로 그 주인공의 비석이었다.

당시 왜-가야-백제의 동맹관계와 고구려-신라의 외교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했다.

사실, 고구려의 남정(南征)은 금관가야와 아라가야(함안) 등 300년대까지 가야제국의 주도권을 행사했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고구려, 신라 연합군의 정벌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던 것. 반면, 대가야가 가야제국의 맹주로 두각을 드러내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전쟁의 상처를 크게 입지 않은데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내부적인 힘을 키워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비에서 동북쪽으로 1km쯤 떨어진 구릉에는 지안 일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위치에 '장군총'이 자리잡고 있다.

가히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릴 만한 장중함이 서려 있었다.

장군총 북쪽에는 용산(龍山)이, 서쪽에는 우산(禹山)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동쪽 멀리는 압록강이 굽이치고 있었다.

남으로 아산만(牙山灣), 동으로 죽령(竹嶺), 북서로 랴오허(遼河)강, 동으로 만주지방을 아울러 한반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장수왕이 평양성을 근거로 활개치다 압록강 건너 묻힌 곳이다.

481년 신라 북부를 공략해 일곱 성을 함락시키고, 대가야를 주축으로 한 가야세력과 백제의 연합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시기의 왕이었다.

당시 대가야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479년) 교류의 물꼬를 트는 등 대외적으로 강성한 힘을 과시하던 때인 만큼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와 당당히 맞섰던 것.

지린성 지안시 태왕(太王)향 하해방구(下解放區)촌. 장군총에서 불과 1km 남짓 떨어져 북한 자강도 만포시와 맞닿은 압록강 중류지역이다.

나룻배에 몸을 싣고 사공이 젓는 노를 따라갔다.

10여분 뒤 불과 수m 앞쪽 강 건너편에서는 손으로 물장난을 치는 만포시의 아이들과 곁에서 빨래에 여념이 없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 마리의 오리는 맑은 강물을 타고 마냥 물장구를 즐겼다.

만포와 지안을 적시는 압록강의 접경지역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1천500년 전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국내성(중국 지린성 지안시)과 평양성(북한 평양특별시)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대륙을 호령하던 곳. 그러나 지금 고구려의 옛 땅은 이 평화로운 강물이 철벽이 돼 둘로 갈라놓았다.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그 철벽을 더욱 공고히 하고, 심지어 천년 이상 흘러온 역사의 물결마저 되돌리려고 하고 있으니….

가야세력이 한 때 백제, 왜와 동맹해 맞섰던 고구려의 두 왕은 그렇게 중국 동북부의 격변하는 소용돌이 한 가운데 묻혀 한반도 역사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