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대가야-(38)하지왕,사신 보내다

479년, 대가야 하지왕은 중국 남북조시대 제나라(南薺)에 사신을 보냈다.

남제 1대 왕의 등극을 축하하고, 상호교류의 물꼬를 틔우기 위해 도읍지 난징으로 향했던 것이다.

섬진강 하구를 통해 남해로 나온 사신 일행은 해안선을 따라 서해(黃海)안으로 올라간 뒤 태안반도 인근에서 중국 대륙으로 직항했다.

황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중국 산둥반도의 청산지아오(成山角)에 도착해 잠시 정박한 뒤 다시 동쪽 해안선을 타고 내려가 양쯔강(揚子江) 하구를 통해 난징으로 들어갔다.

지앙쑤(江蘇)성 난징(南京)시. 대가야 후손들이 목선 대신 비행기와 버스, 택시를 타고 도착한 난징에서는 1천500여년 전 교류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동진(東晉)부터 남조시대 송(宋) 제(薺) 양(梁) 진(陳)에 이르기까지 264년 간(317~581년) 도읍지로 기능했던 도시인 터라 당시의 유물과 유적이 넘쳐났다.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에 견줄만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도시였다.

난징박물원, 난징박물관, 난징대박물관 등지에는 당시 화려한 토기와 무기, 귀금속 등이 즐비했고, 왕들의 무덤도 시내 곳곳에 보존돼 있었다.

그렇다면 대가야의 사신이 도착했을 당시의 중국 왕과 그 근거지인 궁성지는 지금 어떻게 돼 있을까. 남제의 왕이 살았던 궁성지는 남아 있을까.

중국측 문헌에는 궁성지 규모가 동서 1㎞, 남북 1.8㎞라는 기록만 나와 있어 실제 이 터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루오쫑전(羅宗眞.76) 전 남경박물원 연구원은 "남조시대 난징에 있었던 왕궁지 위치는 크게 두 군데가 꼽히고 있다"고 말했다.

한 곳은 극장인 따싱궁(大明宮)과 종통부(總統府;옛 장개석 정부청사) 일대이고, 다른 한 곳은 동난(東南)대학교 주변이라는 것. 모두 난징 시내 중심에 있는 호수인 현무호(玄武湖)의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지난 2001년 따싱궁 일대를 발굴, 거울 등 생활용품과 연꽃무늬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한 주거지 터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나타났으나 왕궁지로 볼 결정적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루오 전 연구원은 "유물이 화려하다는 점 외에 왕궁지로 볼 근거는 미약하다"며 "지형조건이나 주변 여건을 볼 때 오히려 동난대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난징지역 사학계는 남조시대 왕궁지로 일단 종통부와 동난대를 축으로 한 현무호의 남서쪽 지점이라는 데는 의견을 모았다.

대가야의 왕궁지가 경북 고령읍내 어느 지점인지 명확하지 않듯 남제의 왕궁지도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479년부터 502년 7대 24년간 중국 남쪽 대륙을 통치했던 남제. 대가야 사신이 만났던 남제의 초대 왕은 고제(高帝), 샤오다오청(蕭道成)이다.

난징에서 동쪽 양쯔강 하류로 100km쯤 달려 도착한 딴양(丹陽)시. 양쯔강이 도시를 감싸고, 운양운하가 시내를 관통하는 곳. 남제 왕인 샤오(蕭)씨들의 고향이자, 이들이 묻힌 지역이다.

딴양 시내에서 다시 북쪽으로 10km 지점, 논 한가운데 호랑이 형상을 한 석조상(기린:麒麟) 2개가 서로 마주보며 우뚝 서 있었다.

기린은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상상의 영물. 고제의 무덤을 호위하는 동물인 셈이다.

서아시아에서 전래한 기린상은 중국 한(漢)대에서 청(淸)대에 이르기까지 왕 무덤을 지키고 있다.

석조상 하나로 왕 무덤임을 알 수 있는 중국과 달리 한반도의 고대 무덤에는 비문이나 상징물이 거의 없어 역사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운 점이다.

난징대 역사학과 장쉬에펑(張學鋒.41) 교수는 "남조시대 왕 무덤은 시대 순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분포하고, 기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각 10m 간격으로 무덤명을 새긴 '신도비(神道碑)'와 왕의 일생을 기록한 '비석'이 일렬로 세워져 있다"고 말했다.

비석에서 다시 북쪽 500~1천m 지점의 산기슭에 주로 봉분이 축조돼 있다는 것. 광대한 대륙인 만큼 왕릉도 기린상에서 무덤까지 1km 이상 조성한 것이다.

고령 지산동 고분에 묻힌 하지왕과 드넓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중국대륙의 동쪽 딴양시에 묻혀 있는 남제의 고제왕. 1천500여년의 역사가 다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남제의 고제 무덤을 기준으로 동쪽 5km 지점에 명제(明帝) 아버지의 무덤, 12km 지점에 명제 무덤, 다시 동쪽으로 4km 지점에 무제(武帝) 무덤이 각각 분포하고 있었다.

명제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는 기린상을 지나 1km쯤 산 속으로 들어간 기슭에 거대한 동굴 모양의 터가 나왔다.

1964년, 주민이 산 속에서 벽돌 더미를 발견했고, 한 어린애는 이 벽돌을 빼내다 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목숨까지 뺏겼다고 주민들이 전했다.

숨진 아이의 사건을 조사하던 공안요원은 결국 무덤을 확인, 발굴조사까지 이뤄졌다.

아이의 죽음의 대가로 명제 아버지의 무덤이 확인된 셈이다.

난징대 역사학과 장 교수는 남조와 백제 무덤의 공통점으로 △횡혈식(橫穴式) 돌방(石室) 등 무덤 양식 △벽체의 직렬 축조와 등잔(燈盞)을 놓는 자리 △연꽃(蓮花) 문양이 그려진 벽화 등을 꼽았다.

대가야 후기의 무덤도 백제 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을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특히 고아동 벽화고분에 쓰인 안료는 한반도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중국 호남성과 귀주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봐, 중국-백제를 경유했거나 중국으로부터 직접 들여온 문물로 보인다.

중국 남북조시대, 고구려는 30여 차례, 백제는 10여 차례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

대가야는 기록상 한 차례 사신을 보낸 것으로 봐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상대적으로 중국과 느슨한 관계를 가졌던 것. 그러나 가야제국중 어느 나라도 엄두를 내지 못한 사신파견을 이뤄냈고, 더욱이 주변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국제교류를 성사시켜 그 위상을 짐작케 한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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