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위험한 정보의 바다

컴퓨터 파일을 압축하는 기술인 집(ZIP)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미국의 필립 카츠다.

카츠는 1986년 덩치 큰 파일을 작게 줄여서 저장과 전송을 쉽게 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오늘날 윈집(WINJIP)의 모태가 된 그의 기술은 인터넷 시대를 활짝 여는데 큰 기여를 했고, 그는 백만장자가 됐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카츠는 엄청난 부와 명예가 갑자기 쏟아지자 사람이 달라졌다.

술과 여자에 파묻혀 사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든 것이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2000년 4월, 카츠는 위스콘신주 밀워키시의 한 호텔방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한 손에 위스키병을 움켜쥐고 알코올에 찌든 폐인의 모습으로 객사한 것이다.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그는 엄청난 부를 제대로 쓸 줄 몰랐고 명예를 지켜갈 줄 몰랐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돌변한 상황에서 유혹하는대로, 말초적 흥미가 끌리는대로 즐기며 따라다니기만 했던 것이다.

컴퓨터 천재였던 그는 결국 망가진 몸과 파산 상태로 노숙자처럼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성공과 무절제의 결과

성공과 실패의 양극단을 살다간 카츠의 짧은 삶은 오늘날 새로운 문명의 이기로 자리잡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순기능과 역기능, 공헌과 해악의 양면성과 상통한다.

인류의 진보를 위해 개발된 컴퓨터와 인터넷이 통제불능 상태로 치닫는다면 성공 이후 카츠의 삶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지난주 수원의 한 모텔에서 남녀 5명이 극약을 마시고 동반자살 했다.

서로 모르는 사람 5명이 한 곳에 모여 집단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이 충격적인 사건은 아마도 인터넷 자살 사이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터넷의 즉시성과 익명성, 그리고 은밀성이 그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고 죽음을 결행할 수 있게 했다.

지난 2000년12월 강릉에서 처음 자살 사이트를 매개로 한 동반자살 사건이 발생했을때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의 끔찍한 역기능에 대해 경악했다.

그러나 이후 3년여 동안 10여건의 비슷한 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난개발처럼 끝간데 없이 확장되고 있는 사이버공간에 경찰의 사이버수사대 등 관계기관이 일반 세상의 질서를 잡아가듯 불법, 유해행위를 단속하고 계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살사이트의 경우만 해도 찾아내서 폐쇄조치하고 돌아서면 그보다 많은 사이트가 새로 생겨난다.

자살을 반대한다는 '안티 자살사이트'를 표방하면서 되레 자살사이트 기능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동안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불거진 불법, 유해 사이트만도 부지기수다.

자살.도박.폭탄제조 뿐 아니라 매춘.스와핑.병역기피.전과자.범행공모 사이트에 살인청부 사이트까지. 또 반미.반일.반북사이트가 있는가 하면 친미.친일.친북사이트도 있고, 애국자 매도사이트가 있는가 하면 매국노 찬양사이트도 있다.

개별 홈페이지 외에도 카페라는 이름의 동호회와 최근 급증하는 블로그까지 합하면 사이버세상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국내 포털사이트 한곳의 카페만도 무려 150만개나 되는 실정이니 전체적으로는 상상조차 어렵다.

또 구석구석에서 쏟아내는 네티즌들의 글은 그야말로 사막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사이트, 어느 카페에서 '자살하기 좋은 방법' '노예 사고 팔기' '살인의 추억'을 논한들 알 길이 없고, 탄핵에 대해 치고 받은들 소문내지 않으면 저들끼리의 일일 수밖에 없다.

△암울한 공간의 메신저

그러나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그 음울한 공간을 찾아오도록 안내하고 유혹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스팸메일이다.

'정보의 바다'로 나가기도 전에 자신의 이메일 박스 안에서 인성을 황폐화시킬 수도 있는 오염된 상혼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조사 결과 지난해 국내에서 발송된 이메일 중 스팸메일이 전체의 80, 90%를 차지했다.

또 네티즌 10명 중 7명은 하루에 한 번 이상 불륜, 성적 유혹을 일으키는 섹스 관련 스팸메일을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심지어 초교생의 19% 중학생의 26% 고교생의 50%가 음란 스팸메일을 받고 있고, 이들 중 초교생 28% 중학생 52% 고교생 45%가 스팸메일을 통해서 음란사이트를 알게됐다고 대답했다.

이와 다른 한 조사는 중고교생의 8% 정도가 자살사이트를 검색한 적이 있고, 이들 중 6% 이상이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전한다.

인터넷은 이미 '정보의 바다'를 건너뛰어 '방탕의 바다' '범죄의 바다'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바다에 역풍과 순풍이 공존하듯 '정보의 바다'라는 사이버공간에 역기능이 없을 수 없지만 최소한 인간 존엄성과 건강한 사회 발전의 룰은 지켜져야 한다.

건전한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보장하면서, 오염 방지를 위한 국내, 또는 국제적인 합의를 조속히 이룩해야 한다.

익명성과 은밀성을 무기로 끊임없는 탐욕의 바벨탑을 쌓아 간다면 필립 카츠처럼 인류는 스스로 만든 가상의 바다에 침몰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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