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는 과거의 대한 미래의 기록

고구려 패망 30년만인 698년 발해가 건국됐다.

발해의 건국은 몇 가지 의의를 갖는다.

우선 남북국 시대 개막으로 신라의 불완전한 삼국통일을 극복했다는 점이다.

신라의 통일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고구려 땅 대부분을 상실하고 고구려 유민을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차에 고구려 유민 중심의 발해가 건국됨으로써 고구려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고, 만주 지역을 우리 역사의 영역으로 다시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나라 잃은 고구려인의 설움을 씻어준 것 또한 큰 의의다.

패망 이후 고구려인들은 당나라 내지인 요서의 영주지방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당나라의 계략이었다.

생활 터전을 빼앗기고 멀고 낯선 땅으로 강제로 이주했던 고구려 주민들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요서에서 요동으로 당나라 토벌군의 질긴 추격을 뿌리치며 탈출해 나라를 건국한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의 활약은 그 자체로 고구려인의 기상을 보여준 쾌거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발해 건국을 고구려 부흥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당나라는 발해를 자국의 지방국가로 보는 듯 하다.

또 바다 건너 일본국은 발해를 말갈족의 국가라고 주장한다.

일본국은 대조영이 고구려 후손이 아니라 말갈인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우리가 대조영의 핏줄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구(舊)당서'는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신(新)당서'는 대조영을 말갈인으로 기록하고 잇다.

문제는 발해가 역사 기록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발해의 정체성은 오랫동안 논란의 소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발해는 누구의 역사인가. 발해의 제도와 문화전통이 어느 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살펴보면 추론이 가능하다.

발해의 5경 제도는 고구려의 5부 제도에 기초한 것이다.

상경 궁전 일대에서 유행하는 온돌장치와 굴식 돌방무덤, 절터에 한창 세워지고 있는 불상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특히 벽돌과 기와무늬 등에는 고구려의 웅대한 기백이 넘치고 있다.

이런 점을 근거로 역사신문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신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역사는 무덤 속에서 잠자는 화석이 아니다.

역사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과거는 상당부분 후대인들의 손에 의해 새로 씌어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역사전쟁은 영토전쟁만큼 치열할 수밖에 없다.

역사신문이 발해의 역사와 관련, 후대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역사신문사설-역사신문 사설은 역사적 사건 당시 오늘날과 같은 신문이 있었다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생각해보는 난입니다.

※ 참고자료: 국립 중앙도서관.국가지식정보통합검색 시스템.한국역사연구회.역사신문.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청소년을 위한 한국사.이야기 한국사(이현희). 인물/난/미술/서책으로 읽는 한국사(정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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