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채한 대기자의 책과 세상-퇴계평전

격정의 시대답다.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뼈있는 외마디다.

바로 쏘아붙인다.

격식을 차릴 여유는 물론 없다.

대화? 아예 안 된다.

양보? 신사들이나 좋아하는 짓이지.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이다.

어디까지? 망하기 일보직전까지. 영국속담에도 나와 있다.

"우리가 격정을 지배하지 않으면 격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고.

불신임이나 퇴진이라는 용어가 방패로는 적합하지가 않다.

함부로 가볍게 사용해서도 안 되는 말이다.

무조건 아껴야 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그러나 꼭 쓸 데 사용해야할 요긴한 말이 아닌가. 그런 말을 함부로 들고나와 싸우자니. 이건 기 싸움도 아니고 자존심 싸움도 아니고 투정도 아니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유도탄도 될 수가 없다.

툭 하면 튀어나오는 해묵은 수법. 말 할 수 있는 할 말이 그렇게도 없다니. 이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너무 얄팍한 용어다.

어떻게 행정수도 이전 반대를 서울 한복판 거대빌딩 가진 신문사가 주도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밖의 신문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이다.

이건 숫제 국민도 안중에 없다는 뜻도 된다.

행정수도는 옮겨도 국민들이 옮기는 것이고 반대를 해도 국민들이 반대를 하는 것이지 그 주체가 마치 불편한 빌딩 가진 신문인 것처럼 오도하는 것은 속 좁은 처사다.

거대빌딩 없는 신문사의 목소리는 마치 목소리도 아닌 것처럼 오해시킬 소지도 있다.

그놈의 거대빌딩이 무슨 대수인가. 옛말에 덕이 있어야 표현도 있다고 했다(有德必有言). 덕도 없으면서 아무렇게나 표현부터 해버리는 소견머리를 경계해서 이르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부자간에 청렴하기로 이름난 집안이 있었다.

왕이 어느 날 그 아들에게 물었다.

"경의 청렴이 아버지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 아들의 대답이다.

" 신의 아비는 청렴하되 남이 알까 두려워하고 신의 청렴은 남이 모를까 두려워하나이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 정도의 대화가 오갈 정도면 임금도 함부로 어디 가서 입을 아무렇게나 떼지 못할 것이다.

서울에는 지금 이 정도 답할 수 있는 신하조차 없단 말인가.

이황(李滉). 조선시대의 학자요 문신.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이 밖에 퇴도(退陶), 도수(陶 ) 등이 있다.

도산서원을 창설하고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이바지한 업적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선생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퇴계학으로 자리잡아 국내외적으로 매우 활발하다.

'퇴계평전(退溪評傳)'이라는 책이 있다.

영남대에 오래 봉직했던 정순목교수가 펴냈다.

저자도 머리말에서 이 책은 퇴계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인간 퇴계'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서 지은이는 " 퇴계는 이런 사람이다"라기보다는 "퇴계는 이렇게 살려고 한 사람이다"를 조금이라도 더 전달하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그렇다.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정교수는 퇴계의 앎과 삶의 자취를 더듬고 퇴계의 그 말씀과 몸가짐은 물론 나라에 대한 봉사와 정치론, 인물론, 학문론 등 인간 퇴계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고 적확하게 적고 있다.

평전이라는 형식이 때로는 지나치거나 딱딱하고 상식선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 되기 쉽지만 그러나 이 책은 세세한 풀이와 정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보다 확실하게 퇴계에 다가갈 수 있도록 안내해준다.

첫 장을 넘기면 퇴계의 자명(自銘)이 오늘 이 격정의 시대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뿐인가. 벼슬에 나갈 수 없는 이유로 다섯가지를 든 저 유명한 무오사직소 대목에서는 오늘의 그 흔한 청문회 장면이 오버랩돼 까닭 없는 울분이 솟친다.

무오사직소의 다섯가지 내용은 이렇다.

첫째는, 어리석음을 숨기고 자리만 차지하는 것이 부당하고 둘째는, 병든 몸이 하는 일 없이 녹만 축내는 것이 부당하며 셋째는, 허명으로 세상을 속이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 그리고 넷째는, 함부로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벼슬하는 것이 부당하며 다섯째로, 자신이 맡을 일이 아닌데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요즘 이런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자리 높은 양반들.

어저께 한 외신은 최근 열린 영국왕립정신과학회 연례총회에서 세계 1,2차 대전은 스탈린, 루즈벨트, 우드로 윌슨 등 당시 세계 지도자들의 치매라 부를 증상 때문이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치매는 단지 기억뿐 아니라 의사결정, 우선순위 결정, 방향감각과도 관계가 있어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걱정이다.

훗날 지금 우리의 결정들을 두고 후손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는 적어도 나오지 않아야 한다.

"왜 우리 선조들은 행정수도 이전을 할 때 치매 검사를 받지 않았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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