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대지를 축축이 적시는 단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이 고장 최고령수가 죽었다.
700여년을 보경사 절 문 앞에서 수문장 되어 오가는 억만 중생을 굽어보며 인사를 나누던, 가슴높이 둘레가 6.1m나 되는, 속이 텅텅 비어버린 회화나무 노거수였다.
산행 길에 이 사실을 알게된 한 문인의 전화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굽어진 거구의 몸체는 처참한 몰골로 절문 쪽으로 쓰러져 있었다.
이미 굵은 가지들까지도 남김없이 다 잘려 나가고 몸통만이 덩그러니 누워 있어 마치 이제 막 숨을 거둔 맘모스의 시체 같았다.
전날 새벽녘의 다소 거친 비바람에 쇠약해진 몸체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무릎 높이에서 뚝 부러진 것이다.
마을 당산목이며 노거수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 나무 역시 죽어 쓰러져 가면서도 절간 담장 기왓장 한 장일 망정 다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우리네 범속한 눈으로 본다면 살만큼 살다 갔으니 아쉬움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제대로 된 보전조치만 있었더라면 몇 백년을 그 자리에 더 머물러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가슴엔 커다란 동공이 생긴 듯 허탈하다.
그랬다.
노거수회는 이 할아버지나무로 하여금 기어코 천년의 수를 누리게 하려고 애썼다.
회생법을 적은 회지(會紙) 등을 각계 각층에 보내 경각심을 부추겨도 보았다.
1997년 '향토의 대자연전'에 출품했던, 흰 눈 뒤집어 쓴 고고한 자태의 이 고목 사진을 포항공항 대합실에 몇 년간을 전시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유도하는 등 이 나무의 회춘 보전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결국 제대로 된 처방을 받지 못하고 죽고 만 것이다.
노거수의 수명을 연장하려면 뿌리를 회춘시키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속이 비었거나 흠이 있으면 합리적인 버팀 구조물을 설치해야 한다.
이 나무 역시 그 긴 세월 동안 그런 조치는 받지 못했다.
나무의 생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객토와 평토를 한 후 자갈을 깔아 사람 다니기만 좋도록 꾸몄던 것 같다.
흔히들 이러한 인위적 조치로 노거수는 치명타를 입는다.
정이품 소나무가 한 때 중병을 앓았던 것은 잘 꾸민답시고 낮은 곳을 두껍게 객토하고 고른 후 말끔히 조경을 했던 탓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우리들의 얄팍한 지식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생명문화재들을 사라지게 한 것이 그 얼마이던가.
이제 이 절골을 찾을 때면 뭘 보고 첫인사를 나눌까? 한결같은 묵언으로 나그네를 반겨 맞아주던 도승 같은 할아버지나무는 영영 그 자리에 나타날 수 없게 됐다.
하기에 강력한 권유와 지도를 하지 못한 지난 일들이 후회와 아쉬움 되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삼우(포항기청산 식물원장·노거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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