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 별명은 '꽃돼지'가 아니고 '퀴즈영웅'입니다.
"
지난 22일 오전 10시 KBS1 TV '퀴즈 대한민국'을 지켜본 시청자들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나왔다.
시청자들은 올림픽 경기를 보는 것 못잖게 흥미진진한 접전을 즐기며 퀴즈 영웅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어려운 3라운드의 관문을 뚫고 '퀴즈 대한민국'의 역대 최고 상금인 5천168만원을 따낼 수 있을까, 아니면 도전에 실패해 516만원의 상금에 만족해야 할지가 결정되는 기로의 순간이었다.
이렇게 시청자들의 눈을 한시도 못 떼게 만들며 퀴즈영웅에 등극한 사람은 바로 대구의 평범한 전업주부인 김혜경(38·대구시 서구 내당동)씨.
"특별한 것은 없어요. 그저 신문을 열심히 읽은 것밖에는요."
별다르게 얘기할 것도 없다는 김씨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명문대 학생, 전문직 종사자 등 쟁쟁한 사람들도 별 힘을 못 쓰고 떨어지는 퀴즈 프로에서 평범한 주부가 5천만원이 넘는 상금을 받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대다수 시청자들처럼 기자의 궁금증도 그냥 물음표 상태로 남겨 둘 수는 없었다.
그녀를 만나니 신문사, 잡지사 등에서 걸려오는 인터뷰 요청 전화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모두 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어떨떨할 뿐이에요."
그녀는 일요일날 전화기를 아예 꺼놓고 도망(?) 가 있었다며 웃음지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학습지 교사를 몇 달 한 게 사회생활 이력의 전부라는 김씨. 전업주부가 체질이겠다는 생각에 바로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아 키우고 있는 그녀는 스스로 평범하다고 하지만 그저 평범한 주부가 하기는 힘든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신문에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너무 반가워요. 성격이 꼼꼼해서 스크랩을 잘 하지는 못 하고 그저 아무렇게나 찢어서 봉투에 모아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 읽어보고 노트에 정리하는 게 제 취미생활이에요."
한마디로 별난 취미생활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따로 모아놓은 신문 내용들을 보니 분야도 아주 다양했다.
아이들 방학숙제 때문에 모아 놓은 과학면도 있었고 중국 '사스 영웅' 의사로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장옌융 박사 기사, 운보 김기창 화백의 부인 우향 박래현 기사,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리틀보이' 내용이 담긴 기사 등 가지가지였다.
신문 말고도 이면지에 아무렇게나 정리해 놓은 노트를 보니 대단했다.
세계 3대 수학자는? 유클리드, 페르마, 피타고라스. 3대 곡물은? 밀, 옥수수, 쌀. 남한은 3천513개 섬, 남북을 합치면 총 4천198개 섬. T S 엘리어트는 D H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사랑'에 대해 "그의 소설은 병적인 징후가 두드러진다.
파격적인 성 묘사는 그의 특수한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히스토리"….
평범한 주부가 왜 이런 것들을 적어놓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보고 있을까?
"퀴즈대회에 나가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제 취미생활이라니까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버지가 받아보신 매일신문을 열심히 읽었어요. 부고란, 광고란 가리지 않고 읽었죠.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집에 책이 별로 없을 시절이었잖아요."
그녀는 활자매체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것 같다고 했다.
신문이 집에 배달될 때 느껴지는 휘발성 냄새가 그렇게 좋게 느껴질 수가 없다고. 아마도 신문에 중독(?)된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퀴즈 프로에는 우연히 4년 전에 한번 나가고 이번이 두 번째에요. 집에서 틈날 때마다 퀴즈프로를 보는데 아들이 엄마도 한번 출연해 보라는 말에 용기를 얻었어요."
인터넷 예심을 거쳐 KBS 라디오홀에서 200∼300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함께 또 한번의 예심을 거친 뒤 어렵게 지난 4월 출연했으나 너무 떨려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그녀. 이번 패자부활전에서 마음을 비우고 임했더니 하나도 떨리지 않더라며 아는 문제만 나와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지만 퀴즈영웅이 되기까지 단 한문제밖에 틀리지 않은 그녀의 실력은 이미 어릴 때부터 탄탄히 다져져 있었던 셈이다.
"주변에서 로또복권 당첨된 기분이겠다 할 때는 참 서운하대요. 제가 노력한 결과인데. 밖에서 퀴즈영웅이라고 난리이지만 가족들도 제 실력을 별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 같아요."
궁금한 것을 그대로 놔두지 못 하고 지적 호기심이 많은 그녀에게 퀴즈 프로는 그녀의 적성에 딱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퀴즈는 단기간에 공부한다고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저는 기억력이 남보다 좋은 것 같아요. 신문에 지도가 나오니 지리 공부가 따로 필요없고 TV에서 사극 드라마를 보는 걸 좋아해 열심히 보니 역사공부가 필요없더라구요."
퀴즈영웅인 엄마를 닮아서인지 둘째 아들 준하(초교5년)도 여름 캠프에 갔다가 어린이 퀴즈대회에서 결선까지 진출하는 실력을 발휘했다고 자랑이다.
규정에 따라 상금의 절반은 이공계 지원 장학금으로 기증하고 나머지 2천500여만원을 받게 되는 김씨. 상금을 어떻게 쓸 거냐는 질문에 "중학교에 들어가 휴대전화가 필요해진 큰 아들 준명이에게 휴대전화를 사주고 제가 읽고 싶은 책을 샀어요. 그리고 주변에 한 턱 내라고 사람이 많아 돈이 엄청 나갈 것 같네요."
너무 언론에서 떠들면 다음에 퀴즈 프로에 나가기 힘들어진다며 불평 아닌 불평을 하는 그녀.
"전업주부의 생활이 따분하다구요? 천만에요. 신문 읽고 궁금한 내용 정리하고 그러다가 컴퓨터 좀 하고 TV 보고 책 보고 하면 하루가 얼마나 잘 가는지 몰라요."
그녀는 진정한 전업주부 '만물박사'였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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