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야산 홍류동계곡

가야산 초입부터 해인사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홍류동계곡. 가야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홍류동계곡은 계절마다 경관을 달리하여 주위의 천년 노송과 함께 수많은 절경이 10리 길에 널려있다.

요즘은 차를 타고 훌쩍 지나쳐버리는 곳이 돼버렸지만 계곡주변에는 맑은 물과 깊은 숲의 정취가 있고,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럴듯한 전설이 찰랑거리는 물이 되어 미끄러지고 있다. 그러나 계곡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인파가 떠난 지금이 좋다. 솔향을 맡으며 물소리만이 가득한 계곡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으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천국을 넉넉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 한철 피서인파에 몸살을 앓았던 홍류동계곡엔 지금 운치가 흐른다. 고즈넉한 풀숲에선 풀벌레 소리가 맑고 계곡 가득 은은한 소나무향이 진동하니 그 속에 서면 온몸이 맑아진다.

소나무와 집채만한 바위, 하늘로 솟구친 바위절벽이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이 담쟁이넝쿨을 온몸에 두르고 용트림하고 있는 노송뿐만 아리라 다른 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수많은 활엽수가 우거져 있다.

홍류동계곡의 이름은 금강산처럼 계절에 따라 변한다. 가을에는 홍류동이라 부르지만 지금 여름에는 금강산의 옥류천을 닮았다고 해서 옥류동으로 불린다. 수량이 많고 깨끗하며 굽이굽이 폭포와 소를 만들며 흐른다.

관리사무소 옆 칠성대가 특히 그렇다. 옥빛의 물이 바위를 돌아돌아 힘차게 쏟아져 나온다. 그 수량이 엄청나 작은 폭포를 이루고 소를 만든다. 속절없이 흘러제끼는 물소리는 옆사람과의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10여명은 족히 앉을 정도의 평평한 바위만이 세차게 흐르는 물을 견뎌내고 있다.

홍류동계곡엔 고운 최치원에 대한 얽힌 이야기가 많다. 신라 말 어지러웠던 세상을 비관하며 이곳으로 들어온 선생은 홍류동 물소리에 세상 시름을 잊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세상사람들은 홍류동의 세찬 물소리가 최치원의 귀를 멀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선생이 갓과 신발만 남겨두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농산정. 홍류동계곡 제일의 절경이다.

농산정의 자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농산정을 둘러싼 붉은 소나무의 자태가 그것이다. 늙을수록, 허리가 휘어질수록 굳센 생명력을 발휘하는 홍송이 농산정을 부드럽게 안아준다. 더러는 바위벽에 붙어 삶에 대한 질긴 집착을 보여주고 더러는 사모관대 차려입은 가야산의 주인처럼 계곡 가운데 홀로 우뚝 서 있다.

농산정에 앉아 소나무와 바위를 희롱하며 흐르는 무심한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면 숲속 어딘 가에서 조롱과 비웃음을 머금은 최치원이 슬쩍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다. 농산정과 마주보는 석벽엔 최치원이 쓴 시가 새겨져 있다(송시열이 새겼다는 설도 있음).

첩첩한 산을 호령하며 미친 듯이 쏟아지는 물소리에/ 사람의 소리는 지척 사이에도 분간하기 어렵네/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모두 귀먹게 했구나

부드러우면서 힘찬 글씨체를 바라보고 있으면 역사 속 인물과 대면하는 듯 하다. 고운은 농산정에 자주 올라 시심을 달래고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과연 최치원이 이곳에서 신선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름다운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는 최치원이 유독 여기에 많은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볼 때 농산정은 확실히 그의 존재를 깊이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농산정을 뒤로하고 좀 더 상류쪽으로 올라가면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다리를 건너 가파른 계단을 5분쯤 오르면 길상암이 나온다. 자그만한 암자지만 대웅전, 나한전 등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다. 특히 주위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길상암 뒤 절벽 어디에 부처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고 전해진다.

길상암에서 조금 더 오르면 어디선가 맑은 기운이 쏟아져 나온다. 낙화담이다. 낙화담이란 떨어진 꽃이 무수히 떠 있는 못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은 꽃과 단풍은 없고 세찬 물줄기가 꿈틀대고 있다. 협곡이 둘러싸인 곳에서 옥색 물이 쏟아져 나오고 하늘과 맞닿은 절벽에선 눈부신 폭포가 흘러내린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협곡안에는 신선이 된 고운이 웃고 있을 것만 같다.

협곡 안엔 깊은 소가 있다.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가 발버둥치는 양 요동치고 있다.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끝을 모를 정도라니 섣불리 다가선 사람들은 화를 당한다고 안내하던 사무소 직원 김석용(35)씨가 들려준다. 이런 전설은 낙화담을 좀 더 신비한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낙화담을 돌아나와 계곡을 따라 허리가 휜 홍송을 보면서 일주문으로 간다. 일주문과 봉황문 사이의 정갈한 길은 양쪽으로 아름드리 잣나무가 도열해 방문객을 탈속의 세계로 안내한다. 무려 1200년 수령을 다한 봉황문 앞 고사목은 '일장춘몽' 같은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워준다.

일주문을 넘어서면 산문에 든다. 홍류동의 맑은 기운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으니 마음은 이미 신선이 된 듯 하다.

★산정갤러리

나오는 길에 가야산 입구에 있는 '산정갤러리'에 들러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을성 싶다. 한국화가 장윤진(56)씨와 서양화가 정선희(51)씨가 2001년 10월 개관한 이 갤러리는 주위환경과 잘 어울려 그림처럼 아름답다.

현재 장윤진씨의 '실경산수화전'이 열리고 있다. 가야산 자락 곳곳의 풍경과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잡아두었던 우리 산하의 풍경 1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가로 13m, 세로 2.3m의 그림 '가야산'이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장.정 부부의 친절이 인상 깊게 와 닿는다. 문의: 055)932-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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