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잊혀진 문화유산-대가야 궁성지는 어디인가

서기 42년부터 562년까지 520년간 16대 왕이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웠던 대가야의 궁성지가 어디인가?

고령군은 신라에 의해 처절하게 파괴되고 멸망했던 대가야의 궁성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궁성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곳곳에서 유물과 유적을 발견하는 대로 궁성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은 오늘도 멈추지 않고있다.

200여기의 고분이 산 정상부분을 약 4㎞의 길이로 잇고 있는 지산리 고분군(사적 70호)에서는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돼 당시의 그 세력과 문화를 말하고 있다.

고령군은 그동안 국내 최초로 발견되고 가장 규모가 큰 30여구의 부석실을 갖춘 순장 형태의 44호 고분을 복원한 왕릉전시관을 준공하고 박물관 준공을 몇 개월 앞두고 있으며, 300억원 이상을 투입해 대가야테마공원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궁성지를 찾는데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지난 2000년 고령군은 현재 고령읍 지산리 향교 주변을 궁성지로 추정하고 발굴 사업을 추진했지만 궁성지로 인정받을 만한 유물이나 흔적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또 고령경찰서 신축 이전 당시 구 청사를 주차장으로 조성하면서 유물들이 나와 공사를 중단하고 현재 3개월째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지만 궁성지의 흔적은 찾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과거의 기록과 향토사학계에 전해지는 세간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령현 고적조에 '현의 남쪽 1리에 대가야국의 궁궐터가 있고 그 옆에 돌우물이 있는데 어정(御井)이라 전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 한말 향토사학가인 홍와 이두훈 선생이 육필로 기록한 '고령지'(高靈誌)에 '읍지 내에 어정이라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남쪽 1리에 있는데 바로 궁궐터로 전한다.

하나는 관아 북쪽 활 한마당 거리에 있는 '동부'의 동쪽이다.

이것도 대가야왕식정이라 전한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왕정은 현재 고령초교 운동장에 있으며 고령군이 보존하고 있다.

또 고령여자종합고교 담장쪽에 부근 마을 주민들의 음료수로 사용되던 독샘이라 전하는 우물이 있는데 이것이 이 선생이 칭하는 또 하나의 왕정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향토사학가인 김문배(79) 선생은 "광복 후 고령초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학교 운동장 조성시 지름 1.2m의 기다란 주춧돌 몇 개와 호박돌 등을 발견했고, 당시 연세대 사학과 교수와 학생들이 현지를 방문해 조사를 했으며, 조사를 주도한 홍의석 교수가 고령초교 부지 주변이 대가야 궁궐터라는 기록을 연세대 학보에 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에 출토된 돌들은 학교 서편 산자락에 공원을 조성해 보존했으나 이 후 6.25사변때 폭격으로 안타깝게도 모두 파괴됐다는 것.

또 고령초교 주변을 연조(延詔)리, 또 연조리 남쪽 방향에 헌문(軒門)리 등 관아로 추정되는 지명이 남아있는 점으로 미뤄 부군에서 예부터 궁성지가 있었을 확률이 높다는 분석이다.

이 선생의 기록 중 '동부'라는 지명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연조리 동쪽방향 '동배마을'을 칭하고 있어, 대가야 궁성지는 고령초교를 중심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우물인 구신정(九臣井)이 고령읍 연조리 향교터 밑에 자리잡아, 그것도 왕궁터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문배 선생과 신종환 고령박물관장 등은 대가야 궁성지가 520년 간 한 곳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해 가장 유력한 궁성지 중 한 곳이 바로 고령초교에서 옛 고령군청 일대가 될 것이라는 일치된 의견을 냈다.

안타깝게도 추정되는 궁성지인 고령읍 연조리 일대는 인구 밀집지역이어서 앞으로 재개발 등 특별한 변화 없이는 궁성지 발굴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이태근 고령군수는 "앞으로 대가야역사와 문화의 복원, 현창사업을 위해 언젠가는 반드시 대가야 궁성지를 찾아내겠다"고 말해 궁성지 발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고령·김인탁기자 kit@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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