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인 월정교지와 춘양교지가 남아 있다.
요석공주 설화를 안고 있는 월정교와 상류지점 일정교는 신라의 궁성으로 알려진 월성과 매우 가까운 경주 남쪽 문천지를 가로지른 교량이다.
두 교랑은 신라 경덕왕대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다.
교량의 규모나 축조방법을 볼 때 건립 당시 최고의 기술력과 인력을 동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신라시대 최대 규모의 두 교량
두 교량은 1975년에 경주사적관리사무소에서 강 바닥에 드러나 있는 월정교지 유구를 중심으로 실측조사를 실시하면서부터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발굴조사단은 땅으로 드러나 있던 교량지를 중심으로 일부 덮여 있던 모래 퇴적층을 제거한 뒤 유구 실측을 했다.
조사결과 4개의 교각을 12.6m 간격을 두고 세웠고, 형태가 다른 교각을 두 번에 걸쳐 만들었으며, 다리의 총 길이가 63m, 폭이 14m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석교 중 교각 사이가 가장 긴 살곶이다리(箭串橋)의 교각간 거리가 3.8m인 점을 감안할 때 월정교의 교각간 거리가 12m 이상 되므로 월정교의 상판은 나무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나무로 만들어진 상판을 보호하기 위해 상부에 회랑건물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제시됐다.
1985년 12월 월정교지 복원과 관련자료 확보차원에서 춘양교지에 대한 조사가 일부 이루어졌을 때 하상에 노출돼 있던 2개의 교각과 석재 300여점, 동편교대 일부와 날개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4개의 교각으로 이루어진 70m에 달하는 교량으로 추정, 유구와 석재에 대한 사진과 실측도면을 수록했다.
▧ 교량명 바뀐 효불효교
두 교량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춘양교와 월정교로 부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현재 춘양교에 대해서는 일정교, 효불효교, 칠성교라고 부르고 있다.
일정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조선시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일정교는 일명 춘양교(春陽橋)라고 하며, 옛날 부(府)의 동남쪽 문천상에 있고 월정교는 부의 서남쪽 문천상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질 당시의 이름인 춘양교가 일정교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교량명이 바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는 만큼 최초 이름인 춘양교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
효불효교와 칠성교로 부르는 이유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민간에서 구전돼 오던 전설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다리임을 알 수 있다.
일곱 형제의 어머니가 강의 남쪽에 있는 남자와 사통하기 위해 강을 건넜다고 기록돼 있는 것. 그러나 전설처럼 일곱 형제가 만들었다면 배 모양으로 잘 만들어진 다리가 아니라 징검다리 수준의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일곱 형제와 관련이 있어 칠성교라 부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두 교량은 고도의 건축기술이 집약된 구조물로 오늘날에도 기술력의 상징으로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춘양교와 월정교는 규모나 위치, 축조방법을 보아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임이 분명하다.
춘양교의 구조는 배모양의 교각 3개와 동·서교대지로 이루어졌으며 길이 약 55m, 너비 약 15m 규모이다.
월정교는 교각 4개와 남·북교대지가 확인됐고, 교량의 규모는 길이 약 61m, 너비 약 12m이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9년(AD 760)…2월, 궁중에 큰 못을 파고 또 궁의 남쪽 문천상에 월정교와 춘양교라는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근거 자료들도 확인할 수 있다.
두 교량이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두 교량이 하나의 설계도로 만들어진 것과 같이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교량 축조에 사용된 석재들 중 석축석, 교각석, 처마석, 난간석, 귀틀형석재, 팔각석주, 팔각석주대석 등이 거의 같은 방법과 형태로 다듬어진 것이다.
춘양교와 월정교의 위치가 신라의 궁성인 월성 바로 옆이고, 이 다리를 건너면 바로 월성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 심영섭 학예연구실장은 "당시 최고의 기술력과 인력이 투입된 큰 규모의 다리를 두 개나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의 뛰어난 건축기술, 사회적 안정,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를 알 수 있다"며 "신라 최대 최고 돌다리를 복원할 경우 천년고도에 새로운 명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경주·박준현기자 jhpark@imaeil.com사진: 신라의 궁성으로 알려진 월성과 가까운 경주 남쪽 문천지를 가로지른 춘양교지 중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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