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이렇게 발전한 걸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지난 6월 서울에서 열린 남북한 음악 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조국을 방문한 작곡가 서영화(80)씨. 현재 중국 랴오닝성 조선족음악학회와 선양(瀋陽) 조선족 아리랑 예술단 고문을 맡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항일가요, 동요, 무용곡 등 1천여 수 이상의 곡을 만들었다. 일제시대 중국으로 건너간 한인들 사이에 유행한 항일가요와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들에 관한 연구의 권위자로도 손꼽힌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인 그의 가족은 3·1 운동 이듬해 남만주 봉천성(奉天省·지금의 랴오닝성) 싱징현(興京縣)으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1925년 12월 2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 이주 한인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논할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다. 음악과 친해진 것도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풍금을 치면서였다.
작곡에 흥미를 느낀 그는 스무 살이던 1945년 해방을 맞아 '8·15는 만세 부르는 날' 등의 동요를 만들며 본격적인 작곡 활동에 나섰다.
"8·15는 우리나라 만세 부르는 날/일본 천황 라디오로 항복하던 날/못 배우던 우리 한글 배우게 되니/나는야 기쁘구나 왜놈 망해서//8·15는 우리나라 만세 부르는 날/쪽바리 게다짝을 불사르던 날/못 입었던 색동옷에 꽃치마 입고/나는야 당실당실 춤을 췄지요"(1-2절 가사).
1946년 서씨는 싱징현 조선의용군에 가담했다. 하지만 조선해방을 목적으로 참가한 조선의용군이 중국인민해방군으로 변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 한국군과 총부리를 겨누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외국 놈들이 갈라 놓은 38선에서 우리끼리 싸움질을 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까지 남북으로 갈려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프기만 합니다."
그는 항일가요 관련 자료 수집과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그가 발굴한 수많은 항일가요 중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건 바로 '안중근 옥중가'다. 작자를 알 수 없는 이 곡은 그가 1986년 안중근 의사의 고종 6촌 여동생인 곽희종 여사를 직접 만나 채록한 것. '망향가'에 가사를 붙인 이 곡은 안중근 의사의 옥중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적막한 가을 강산 야월삼경에/슬피 울며 날아가는 저 기러기야/북방에 내 소식을 네가 아느냐/여기서 저기까지 몇리 되는지/아차차 가슴 답답 이 내 신세야…."
서씨는 의용군 출신 조선족 작곡가 중 현존하는 유일한 인물. 조선족 음악인들에 대해 증언하고 자료도 수집해 정리하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임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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