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객기가 낯선 이국에 닿자 어린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 전까지 외국인 품에 안겨 철없이 잘 놀던 아이였다. 서너 살쯤 되는 어린이지만 뭔가 낌새를 알아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어린이가 어찌나 슬피 우는지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리게 할 정도였다." 유럽 어느 나라로 입양돼 가는 우리나라 어린이를 보고 누군가가 전한 이야기지만, 아직도 우리의 이런 '부끄러운 자화상'은 현재진행형이다.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도 마찬가지다.
◇ 6'25 한국 전쟁의 포성이 멎은 뒤 남한만도 전쟁고아와 혼혈아 수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정부는 1954년 '고아 양자 특별 조치법'을 만들었다. 해외 입양으로 문제를 풀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홀트아동복지회 창립자인 해리 홀트가 우리 어린이 8명을 외국으로 보내면서 해외 입양이 본격화됐다. 1980년대 들어서는 미혼모와 이혼 가정이 늘어나면서 한동안은 그 수가 7천~8천 명이나 됐다. 지난 반세기 동안 무려 20만 명을 기록했다.
◇ 해외 입양은 전쟁의 포연과 절대빈곤의 시절을 투영한 어두운 그림자였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시대에 살면서도 그 그림자를 벗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국내 입양보다 해외 입양이 훨씬 많아 그들의 '뿌리 찾기'고통은 여전히 덧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같은 기형적 입양 구조는 국내 입양이 저조하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해외로 입양된 어린이는 2002년 2천365명, 2003년 2천287명, 지난해는 2천258명이다. 1900년대에 비하면 거의 두 배 정도로 늘어난 채 2천 명 선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편, 지난해 국내 입양아는 1천641명으로 해외 입양아보다 37.6%나 적다고 한다. 이 같은 사정은 대구도 비슷하다. 지난해 입양 대상 어린이는 215명이나 대구에 입양된 경우는 고작 61명에 지나지 않는다.
◇ 우리 '현대사의 슬픈 단면'이라 할 수 있는 '해외 입양' 반세기를 이미 지난해 넘겼다. 그러고도 우리와 경제 사정이 비슷한 나라들 중 여전히 해외 입양 으뜸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는 없을까. 한국 전쟁 직후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먹고 살 만한 나라'가 된 지금도 우리 아이들을 우리가 책임지지 못한다면 '감추고 싶은 치부'가 아닐 수 없다. 이국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며 앓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가슴 아프지 않은지….
이태수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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