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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의 사상기행-(10)기회주의의 창조적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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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라는 말은 이제까지 현실에서 매우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굳이 부정적 색채를 지닌 이 용어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양극단으로 제각각 분열하고 있는 어수선한 오늘의 문제를 바라보는 제3의 눈을 여는 과감한 지적 모험, 지적 유희의 길에 나서보자.

◇생명은 근원적 질서

이 과정은 근대적 지성의 절대적 진리관을 뛰어넘는 탈근대적 사유의 전복 과정이며 새로운 진리관을 탐색해가는 도발적 '가로 지르기'의 과정이 될 것이다.

나는 지식인이자 민초다. 나의 현실적 삶은 지식인이지만 나의 사상의 중심과 근원은 민초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생활하는 민초들은 소박하고 단순하긴 하지만 그 스스로의 철학적 논리가 있다. 생명운동은 민초의 생활하는 운동으로서 구체적인 참모습을 드러낸다. 생명은 보이는듯 하나 보이지 않는 근원적 질서이다. 따라서 그 근원적 질서가 드러난 질서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민초들의 구체적 생활운동이며, 생활의 개혁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인간과 자기 자신 사이의 일상적인 생활원리의 실현인 것이다.

민초들은 동서고금을 통해 안정과 변화, 개혁과 균형을 동시에 요구해 왔다. 민초들은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진보적인 역설적 논리와 생활감각을 가지고 살아왔다. 이것을 폄하하는 지식인들이 많지만 나는 그들과는 반대로 생각한다. 생활하는 민초는 근원적인 생명을 거의 무자각적으로 자기 생활에서 실현하는 사람들이다. 생명 자체가 가진 역설적인 이중성을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현하며 양극단을 동시에 요구하기도 한다. 오늘의 민초들은 개발과 환경보전을 동시에 요구하며 극단적인 보수와 급진적 진보를 동시에 혐오한다. 또한 진보적 지향과 보수적 지향을 완만한 형태에서 상호보완적으로 이중적으로 함께 요구하며 그 스스로 안정과 변화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 민초들의 생활이요 잠재적인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속담과 구전들 속에는 이 같은 민초들의 역설적 기회주의적 이중성이 드러나고 있다.

◇기회주의의 창조적 변용을 철학으로

나는 민초 자신의 철학으로서 기회주의의 창조적 변용을 주장한다. 나 자신 기회주의의 창조적 변형을 내 사상의 가장 단순 소박한 표현으로 삼고 싶다. 뜻 그대로의 기회주의란 원래 매우 좋은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는 틀 기(機)자로서 하나는 하늘의 기틀이요, 둘은 땅의 기틀이요, 셋은 사람의 기틀을 의미한다. 하늘의 기틀을 일러 천시(天時)라 하고 땅의 기틀을 일러 지리(地理)라고 하며 사람의 기틀을 일러 인화(人和)라고 한다. 천시와 지리와 인화의 세 기틀이 만나는 것을 일러 기회(機會)라고 한다. 바로 때와 민심과 사회조건이 다 들어맞는 균형적 관계의 파악과 실천, 이것이 기회주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회주의는 이미 민초의 생활감각 자체로 체화되어 왔다. 6·25 당시 수많은 가정에 일반화 되었던 현상 가운데 하나는 큰 아들은 국군이고 작은 아들은 빨갱이인 경우이다. 윤흥길의 소설 '장마'가 그러하며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들 역시 그러하다. 그때 두 아들을 둔 늙은 모친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늙은 모친은 좌·우익의 사상 이념 따위야 전혀 알지도 알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큰 아들이 옳고, 작은 아들도 옳다고 생각해 큰 아들인 국군이 승리할 때는 작은 아들인 빨갱이의 안부를 한없이 걱정하고 작은 아들인 빨갱이가 쳐들어 올 때는 큰 아들의 목숨을 걱정한다. 이 역설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대체로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기회주의는 강자에게 빌붙어 약자를 멸시하면서도 때로 약자에게도 미래의 변화를 염려하여 약간의 비밀을 주는 정도로 양쪽 모두에 선을 대고 있는 경향을 말한다. 그러나 이 늙은 모친의 기회주의는 그와는 정반대다. 큰 아들인 우익이 강세일 때는 작은 아들 빨갱이를 걱정하고, 작은 아들인 빨갱이가 강세일 때는 큰 아들 우익의 안녕을 걱정한다. 바로 이러한 태도를 기회주의의 자각적이고 창조적인 변용이고 활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도록 논리적인 훈련에 의해서가 아니며 주역의 시중론(時中論)이나 생명의 이중적 역설, 아니다 그렇다의 논리를 체득해서가 아니다. 늙은 모친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원초적인 영성적 생명의 사랑이 있으며 이 사랑이 바로 신령한 기화(神靈氣化)이다. 동학의 주문 가운데 모심(時)을 설명하는 말, 시자 내유신령 외유기화(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의 표현이 바로 이 모친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색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은 이미 생명의 역설적 이중성을 체질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강자인 큰 아들을 인정하면서도 약자인 작은 아들 쪽에 마음의 중심을 두게 되는 것이다. 또 작은 아들이 강세일 때 작은 아들을 인정하되 약세인 큰 아들을 걱정하여 오히려 그쪽에 중심을 두게 된다.

◇모정은 민초사상의 기초

나쁜 기회주의, 무자각적 기회주의, 제 한 목숨만 살아보자는 도생적 기회주의가 강자에게 빌붙고 약자를 멸시하되 약자에게도 약간의 더러운 빌미를 주는 정도의 균형을 잡는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다. 이러한 기회주의, 보수적이며 진보적이고 또 양극의 관계를 그 중심이동에 따라 다 같이 포용하고 중심을 이동시키는 이 원초적 사랑, 모친의 심성, 이것이 민초사상의 기초다. 그리고 이것은 근본적으로 아직 숨겨진 질서의 불연(不然), 즉 아니다에 중심을 두고 현실의 드러난 질서에서의 이것과 저것, 양극사이의 기우뚱한 균형관계를 모색한다.

이 논법은 "이것은 저것이 아니고 저것은 이것이 아니다"라는 형식논리나 "이것과 저것은 서로 모순되며 둘은 투쟁과정을 통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기고 병합한다"는 변증법의 논리와는 차원이 다른 역설의 논리다. 이것이 생활하는 민초의 생활논법이다.

환경과 개발 사이의 관계도 민초들은 이것을 동시에 요구하되 어떤 때 또는 어떤 입장, 어느 지역에서는 환경에 어느 입장에서는 개발에 중점을 두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무자각적 기회주의가 아니라 보다 창조적이고 자각적이고 대담한 기회주의라 한다면 오히려 환경에 중심을 강하게 두되 개발의 내용과 방향을 수정하는 끊임없는 주민 공청회를 통해 유연한 타협과 대안제시 등을 통해 양극의 창조적 균형을 잡아나가게 될 것이다.

근본주의와 개량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중심을 어느 쪽에 두느냐는 것은 상황과 입장과 때의 변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근본에서 이 전체를 결정하고 지배하고 추동하고 수정하고 견인하며 북돋우는 그리고 끊임없이 그 자체를 살아 생동하게 만드는 근원적 질서인 영성적 생명, 그 표현인 사랑, 깊은 공경, 근원에 대한 직관적인 깊은 기감, 바로 이러한 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민초철학으로 제3의 길을

이와 같은 민초 자신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그리고 생동하는 양극 상호보완적 논리와 철학을 기초로 하여 우리사회의 남북분단과 모든 전환기적 갈등 등을 단순히 대립적 투쟁적 모순으로 보지 않고 대립 사이의 상호보완적 관계로 변형시키고 개혁해 가는 제3의 길을 열어야 한다. 예컨대 보수와 진보의 기우뚱함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틈, 바로 이 틈으로부터 지나친 급진편향이나 극우 보수화나 오만불손한 지향에 대해 공격 가할 수 있게 된다. 기우뚱한 편차 사이에서 생기는 이 틈이 곧 상호보완적 질서 속에서의 비판과 싸움의 여백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경과 개발에서도 지나치게 환경일변도의 개발부정, 원리주의적 생태주의 거의 체제 파괴적 아니면 무정부적 내지 원시 환원적 농경사회의 복고적 지향에 대해서는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반대로 개발 지상의 지역 경제성장주의에 대해서는 그것이 가져올 환경에 대한 무차별적 파괴와 지역의 생명과정의 해체와 인간가치의 상실 등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해야 한다. 이러한 제3의 논법을 발전시켜 스스로 삶에서 일어나는 양극적 관계에 대해 슬기롭고 부드럽게, 그럼에도 기우뚱한 양극 사이의 틈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양극의 지향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그 균형을 다시 온전하게 하는 비판적 정치력을 이끌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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