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앞 큰 길에 '야간 국민학교'라는 포장마차 형 술집이 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도 그 술집은 꽤나 붐비는 눈치다. 새벽 두세 시까지 야간 국민학교라 적힌 노란 간판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나는 자정 무렵 아내와 산책하러 그 앞을 지나면서 이렇게 농담하곤 했다.
"내일 기말고사 보는갑네. 아직도 불을 안 끄는 거 보니."
아내는 웃고 말았지만 나는 야간 국민학교에 대한 아릿한 기억에 잠겼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도 '야간 국민학교'가 있었다. 방과 후 교사들까지 모두 퇴근한 밤이 되면 교사(校舍) 끄트머리에 있는 교실 하나에 불이 켜졌다. 매일같이 밤 11시가 되어야 불이 꺼지는 그곳이 바로 '야학(夜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끄트머리 교실은 내가 수업 받는 교실이었다. 어쩌다 밤에 그 교실을 가보면, 키가 큰 청년들이 내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어서, 이상하게도 내 자신이 키가 성큼 커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70, 80년대에는 상당수 학교에 그 같은 배움의 장소가 있었다. 물론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 않았고 교사도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독지가들의 후원과 대학생 교사들의 열정으로 야학이 운영되었다. 야학은 비정규 중등학교 과정인 고등공민학교로 발전하기도 했고 드물게는 정규학교로 이어진 예도 있었다. 70, 80년대 야학이 그랬지만, 아마 육이오 전후에는 이렇게 천막학교로부터 시작한 사립학교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야학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0년 전, 내 자신이 소설도 제대로 못쓰는 주제에 동료 작가와 더불어, 무료로 빌려주는 강의실을 전전하며 문학교실을 운영했다. 대구에 마땅히 소설 창작을 배울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그거, 돈 좀 됩니까?" 하고 물었다. 내 가난한 처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일 테지만 나는 섭섭한 마음에 구차한 설명까지 보탰다.
"강의료는 받긴 하지만 2차 회식 때 모두 써버리지요. 다른 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문학정신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문학교실이든, 야간 국민학교든 모두가 일종의 사학일 텐데, 어떤 교육적인 정신이 없으면 기본적으로 사학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며칠 전 국회에서 사립학교법이 몸싸움 끝에 통과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내가 놀라웠던 것은, 법을 통과시킨 의원들이 사립학교가 비리의 온상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리를 꾀하려고 건립되었으니 비리가 생길 수밖에 없고 따라서 기업의 사외이사처럼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지였다.
현재 법적으로 문제된 사학이 전체 사학의 1.5% 남짓 된다고 하나 일반 국민이 체감하는 비리 사학의 수치는 이보다 훨씬 높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학이 돈벌이를 위해 세워졌다는 시각은 도저히 수긍하기 힘들다. 우리나라 사학의 출발이 여러 종교단체들의 노력에 의해서였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다.
사학법 통과를 격렬하게 반대한 한나라당 쪽의 주장도 수긍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개방형 이사에 전교조가 들어와 학교가 '좌경사상' 양성기관이 될지도 모른다는 도식적 사고로는 현재의 사학문제에 접근할 수 없지 않은가.
앞으로 오랫동안 사학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는 심각한 갈등에 휩싸일지 모른다. 안타까운 점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치를 하는 와중에 대다수 사학의 건립 정신은 씻기 힘든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사학은 우리나라의 발전에 가장 지대한 토대역할을 해왔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건학이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많은 사학들의 선한 노력이 어린 학생들의 미래를 가꾸어왔다.
사학을 두고 격렬하게 대치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예전 아름답기 그지없었던, 건학 정신이 새파랗게 살아있던 사립 야간학교를 떠올리는 것은, 나만의 안타까운 감정이 아닐 것이다.
엄창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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