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밤에/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나홀로 걸어가네/ 저멀리 불빛 사이로….'
노래방에 가면 새로 수록돼 있는 최신 트로트 가요 '장대비'의 가사다. 가수는 대산(大山). 생소한 이름이다.
윤종규(尹鍾奎·53) 한국에어브레이크 사장의 예명이 대산. '트로트 가수 CEO'인 셈이다.
◆얼떨결에 가수가 되다=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다 발안나들목에서 내려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구장리에 있는 한국에어브레이크를 찾았다. 번듯한 소파 하나 없는 사무실에서 만난 윤 사장은 허름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무대에 서면 그는 180도 달라진다. 중절모가 무척 어울리고 색소폰을 물면 청중을 압도한다.
윤 사장은 2004년 7월 수원공장에 들렀다가 길에서 우연히 색소폰 교습소를 발견했다. 갑자기 색소폰을 배우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고 도전정신이 강한 그는 당장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주인이 나들이를 갔는지 문은 잠겨 있었다. 한동안 공장 일로 잊고 있다 다시 생각나 전화를 했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밤배' 작사·작곡자인 김덕(51) 선생이다. 미국에서 25년간 살다가 5년여 전 귀국해 수원에서 조용히 가수 지망생을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윤 사장은 색소폰을 정말 열심히 배웠다. 어느 날 김덕 선생과 문하생이 자리한 회식에 참석했다. 술잔이 돌며 문하생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한 곡씩 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기분이 좋아진 윤 사장도 한 곡했다. "노래가 끝나자 선생님이 한 곡 더해보라고 해서 또 불렀죠. 그랬더니 색소폰보다 노래를 하라고 하시데요."
몇 달 연습 끝에 지난해 4월 용산구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3회 대한민국 트로트가요제'에 참석했다. 배호 기념사업회가 침체된 트로트계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만든 가요제다. 결과는 창작부문 금상. 중소기업 사장이 가수가 되는 순간이었다. '사랑의 죽변항', '대관령' 등 다른 창작곡과 함께 CD도 냈다.
"이 나이에 가수라니 웃기죠? 울진에서 살던 어린 시절 노래 잘 한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가수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표곡 장대비는 노래방에서 사람들이 엄청 불러여."
◆목숨 걸고 일했다=윤 사장은 고향에서 매화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려운 살림에다 부친이 한문이나 배우면 되지 학교 다닐 필요가 없다는 소신을 갖고 있어 중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하고 부산에서 고교를 다녔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눈물 많이 흘렸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 고생은 돈 주고 사서라도 한다고 하잖아요. 사회에 나와 무슨 일이든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릴 때 고생한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고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쳐 서울 개포동사무소에서 87년까지 공무원 생활을 했다. 판에 박힌 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사표를 내고 수원에서 공업용 다이아먼드를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죽을(부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 목숨 걸고 근검 절약하며 맹렬하게 일한 덕분에 돈을 조금 모았다.
2000년 기아 사태로 부도가 난 한국브레이크의 에어브레이크 파트를 인수했다. 한국브레이크 관계자들은 성실하고 신용있는 윤 사장을 눈여겨봤다. 수위부터 사장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고 실수가 없는 윤 사장이라면 한국브레이크가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핵심요원과 설비, 지적재산권 등을 포괄인수하는 조건이었다. 60억~70억 원 들어간 공장을 15억~20억 원에 인수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현재 근무하는 80여 명의 직원 가운데 다수가 한국브레이크 출신들이다.
"내 사업이지만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직원들과 같이 먹고 사는 거죠. 그 덕분인지 노조도 없습니다."
◆빚이 없는 회사=한국에어브레이크는 대형트럭, 특장차에 부착되는 에어브레이크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 현대모비스와 대우자동차에 주로 납품한다. 에어브레이크 시스템 전체를 만드는 유일한 회사이기도 하다. 매출액도 매년 20%가량 고성장하고 있다. 구체적 액수를 묻자 "세금을 많이 내라 할텐데…"라며 싱긋 웃는다.
기술은 '세계적'이라고 자부한다. 생산품 100%를 전수 검사한다. 브레이크는 자동차의 핵심 부품으로 사소한 하자라도 있으면 대형 사고로 이어지므로 검사가 철저할 수밖에 없다. 20년 노하우를 가진 한국에어브레이크는 이제 일본 나부코, 미국 MGM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갖게 됐다.
재무구조가 매우 튼실하다. 화성공장 인근인 발안산업단지에 1천400평 공장을 새로 만들고 있지만 빚이 거의 없다고 한다.
3년 전에 설립한 중국공장이 호황을 띠고 있어 한국에어브레이크 관계자들 기대가 크다. 품질을 크게 고려하지 않던 중국이 지난해부터 수준이 높아지면서 고품질 에어브레이크 시장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태진아보다 더 잘 부른다=윤 사장은 노래를 열심히 한다. 새벽 6시에 집에서 나와 2시간가량 색소폰과 노래를 연습한 뒤 출근한다. 양로원, 복지시설 등지를 찾아 짬짬이 공연한다. 수원, 화성 일대에선 이미 유명인사라 TV 등 매스컴 출연도 잦다. 저녁에도 따로 연습을 한다. 공연을 위해 싱글 수준인 골프도 잘 치지 않는다.
이처럼 열심히 연습하는 이유를 묻자 유명 가수가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 태진아보다 노래를 더 잘한다는 말에 기자가 웃자 "정말이다"면서 "그래도 나보다 더 유명한 태진아 노래를 듣는 것을 사람들이 더 즐거워 한다. 나도 유명 가수가 돼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최재왕기자 jw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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