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전인 1964년 6월 17일, 대구에서 때 아닌 '보물소동'이 벌어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날 대구시 중구 문화동 38번지에 있던 육군 8053부대(방첩대)의 지하실에서 신라시대 각종 토기를 비롯, 삼국시대 및 송·명대의 희귀 문화유물 149점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전국의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지하실에 들어간 전기수리공에 의해 처음 발견된 유물들 가운데는 신라시대의 귀면와(鬼面瓦), 연화문와(蓮花紋瓦) 등 각종 토기와, 고려시대의 청동경(靑銅鏡)과 자기류, 송·명대의 채색호(彩色壺)와 옥잔 등 보물급 문화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발견 당시 유물들은 60여 개의 오동나무 상자에 담겨, 6평쯤 되는 으쓱한 지하실 바닥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보물급 유물 외에도, 근대 일본의 국보급 서화('동해도 53차') 20여 점과, 고려자기 및 일본의 근대 고급자기 수백 점도 함께 발견되어 고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지하실이 포함된 주택의 원소유주가 일제 강점기 대구의 거부이자 유명한 고미술 수집가였던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였음이 밝혀져, 이들 유물 역시 그가 수집, 소장하다가 일제 패망으로 귀국하면서 은닉해 둔 것이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1870년 8월, 일본의 지바(千葉)현에서 태어난 오쿠라는 가냘프면서도 지적으로 생긴 용모답게 동경제대 법대를 졸업, 35세 때인 1905년 봄 이주 1세대의 일원으로 대구에 정착한 사람이다. 그는 이주해오기 3년 전, '콜브란'이란 미국인으로부터 민간 전기사업이 장차 조선의 유망사업이 될 것이란 귀띔을 받고, 이 사업에 관한 각종 자료를 잔뜩 갖고 대구에 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구성 철거에 따른 땅 투기로 전기사업을 위한 종자돈을 듬뿍 마련한 오쿠라는 처음 50㎾의 소규모 발전사업에서 시작, 30여 년 만에 조선 전기계의 왕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대구는 물론, 서울, 회령, 함흥, 광주, 울산, 제주, 여수, 순천, 고성, 안동, 경주 등 전국에 자매전기회사를 거느린 '대흥전기회사'의 사주가 된 것이다. 이들 회사들이 해방 후 모두 '남선전기' 회사로 통합되었다가 나중 '한국전력'의 모태가 되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전기사업에서 번 돈으로 금융업에도 진출한 그는 대구상공은행두취(頭取:은행장)와 대구증권회사 사장도 겸했다. 또 대구상공회의소 회두(會頭:회장)와 경북도평의원, 대구부(府:시)의원도 수 차례 겸직, 대구의 대표적인 거부이자, 영향력이 큰 인물로 손꼽혔다.
그의 취미는 골동품 수집, 그 중에서도 신라문화유물에는 일가견을 지닌 독보적인 수집가였다. 국보급 신라금관과 금불상은 물론 각종 진귀한 토기류가 그의 수집대상이었다. 이 밖에도 값 비싼 고려청자, 이조백자, 청동유물, 서화류 등이 대량으로 그의 손에 들어갔다. 전쟁말기에 이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밀반출되어 안전한 곳에 은닉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오늘날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는 바로 그 '오쿠라 컬렉션'의 모체이기도 하다. 20여 년 만에 발견된 대구 옛집의 유물도 결국 더 귀중한 탈출봇짐에 밀려 뒷날을 기약하고 숨겨둔, 그의 '2류급 애장품'에 불과했던 셈이다.
골동품 수집에는 재력과 안목 외에, 열정이 따라야만 가능하다. 열정이 지나치면 '탐욕'일 수밖에 없는데, 오쿠라의 경우는 '열정'이란 미명 아래 조선고미술에 대한 편집광적 수탈욕구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 정평이다. 골동품에 대한 가치인식이 희박하던 시절에 그저 줍다시피, 혹은 칼과 돈으로 한껏 수탈해 갔음에도 오쿠라는 못다 가지고 간 유물들이 애석해, 여러 번 염탐꾼을 대구에 보냈다간 실망만 크게 하고 숨졌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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