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고1 학부모입니다. 중학교 때보다 성적이 너무 떨어져 좀 나무라면서 이유를 물어보니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시간만 나면 컴퓨터 앞에서 혼자 낄낄거리거나 중얼거리며 부모와는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움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잘 하던 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성적이 뚝 떨어져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면 학생 자신은 물론이고 부모님조차 학생의 능력을 의심하고 결국에는 모든 희망과 기대를 저버리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어쩌다 시험을 못 쳐 성적이 떨어질 경우, 부모는 자녀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질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시험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꾸중하며, 자녀에게 심한 부담을 줍니다. 학생은 나름대로 반성하고 열심히 공부하지만, 그 노력의 과정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고 계속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여러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생산성은 전과 같지 않습니다.
드디어 시험날이 다가와서 시험을 칠 때 학생은 시험 자체에 몰입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문제풀이에 쏟아넣지 못하고, 원래의 성적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기 쉽습니다. 문제지 사이로 부모님과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르고 뒷일이 걱정되어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보면 또다시 시험을 망치게 됩니다. 그 다음 달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결국은 원상회복의 의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학생이 학습의욕을 상실하게 된 과정을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좋아하는 정도가 도를 넘어 그것이 빚어낸 가상세계로 현실을 대체해 버리고 스스로 그 안에 갇히는 사람들을 일본어로 '오타쿠'라고 합니다. 그들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은 뒤로 한 채 만화, 비디오게임, 아이돌 스타와 같은 가상세계에 몰두합니다. 일본에서 20년 이상 살며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 기자 에티엔 바랄이 쓴 '오타쿠-가상세계의 아이들'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공부하라, 일하라, 소비하라'란 절대명령이 지배하는 일본사회에서 표면적인 안락함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경쟁에 직면해야 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생산사회에 들어가는 대신 가상의 세계나 유년의 놀이문화에 남기를 택한다는 것입니다. 심리적 퇴화 또는 자폐 증상에 가까운 오타쿠는 일본 사회의 모순이 빚어낸 희생자이자 이탈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보다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일본정신과 억압적인 학교 교육에 학대당한 젊은이들이 스스로 선택한 생존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현실보다 상상의 세계가 더 좋다. 나를 인정해 주지도 않는 사회의 규약들을 지켜서 무엇하냐"라는 한 오타쿠의 외침은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튀어나온 못은 두들겨야 한다'라는 일본 속담을 상기시키며 '튀어나온 못'의 고뇌와 고통은 외면한 채 그냥 돌출부를 두드려 박아 넣으려는 피상적인 조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어른이 보기에는 한심하고 하찮게 보일지라도 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른이 먼저 진실한 마음으로 가슴을 열면 아이도 마음의 문을 열 것입니다. 억압과 강요로 튀어나온 못을 박아 넣으려고 하면 할수록 아이들은 말문을 닫고 자기만의 폐쇄된 세계로 들어가 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격려와 악담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 아직까지도 매질과 꾸중과 간섭이 학생을 분발하게 하는 특효약으로 생각하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위기를 들먹이며 남을 통제하려는 사람에게서는 남을 설득시키려는 진정한 노력과 고뇌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위기론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위기론의 무자비한 횡포 앞에서 대부분 힘없는 개인은 위기 극복의 의지를 갖기보다는 불안감 때문에 무기력해지기가 쉽습니다. 위기론 속엔 가학성 잔인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불안감은 인간의 모든 잠재 능력을 파괴하고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위기감으로 남을 다스리려는 사람이나 그 피해자 모두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슬기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들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실패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시험을 못 쳤을 때 주변 사람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이 말하지 않아도 본인 스스로 몹시 괴로워하며 반성을 합니다. 평소 생활에서 못마땅한 것들을 들춰내어 심하게 꾸짖으면 마음에 상처만 입고 재기의 의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칭찬과 격려의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아납니다.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면 자신도 이상하게 느낄 정도로 어려운 문제들이 쉽게 해결됩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적으로 쌓이게 되면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어른은 자신의 젊은날을 돌이켜보며 청소년의 입장에서 충고와 조언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부모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전이 없을 때는 전문가를 찾아 도움을 받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윤일현(송원학원진학지도실장 ihn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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