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막 뽑은 거니더."
집 주인은 야생 참마(麻)를 뚝뚝 잘라 접시에 올렸다. 뽀얀 마에서 나는 흙내가 코끝에 싱싱하다. 한 토막 베물자 입 속에서 미끌미끌 거품이 부푼다. 거품은 녹차 한 잔에 슬그머니 녹는다. 처마 아래 풍경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녘으로 퍼진다.
"수염은 왜 그래 기르십니까."
"기르는 게 아니라 안 깎는 겁니다."
수염 덥수룩한 주인은 인심좋게 계속 차를 권한다.
경주시 내남면 상신 2리. 산 기슭에 자리잡은 도예가 기현철(39) 씨의 집은 동네 입구에서도 한눈에 띈다. 집 앞에 펼쳐진 200여 평의 차 밭과 계단식으로 된 세 개의 작은 연못이 다가온다.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작은 항아리 도자기가 우체통마냥 얹혀 있다. 본채와 별채, 가마터, 연못, 텃밭에서부터 심지어 고조부 산소까지… 1천 평 넓이에 있을 것 다 갖춘 이 집에는 정작 담이 없다.
'구토란.'
옛날 도랑 자리(구 또랑)라는 이름의 이 양지바른 동네는 기씨의 고향이다. 어린 나이에 도예를 배우러 도시로 떠났던 그는 이곳으로 돌아와 10년째 전통 다기를 만들고 있다. 그는 고향 땅에 내 집을 짓겠다는 일념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벽 세우고 지붕 올리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무는 산에서, 흙도 산에서… 돈 들게 뭐 있나? 정말 100만 원만 있으면 집을 지을 줄 알았다니까요."
도시에서 30만 원 월급받고 도자기 기술 배우며 모은 돈은 건축 설계 내는 데 사라졌다. 이웃의 반대도 컸다. 10년 전만 해도 기씨의 집터는 풀숲과 잡목이 우거지고 웅덩이가 있는 버려진 땅이었다. 기씨는 "삽 한 자루 들고 시작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보다 못한 이웃들이 경운기를 빌려줬다. 모자란 건축비는 건설현장 일을 하면서 보탰다. 어깨너머로 집 만드는 과정도 눈여겨봤다. 지붕과 벽을 이는 데 쓰인 수 천장의 폐기와는 기와공장과 절에서 버리는 것을 얻어왔다. 그렇게 혼자 본채를 만드는 데만 3년이 걸렸다.
"뭐… 전문가들이 우리집을 보고는 재미있다고 하데요. 자기들은 이런 집 도저히 못 짓는다고."
본채가 딱 그렇다. 자로 재서 지은 집이 아니다. 그런데 동서남북 어디서 보든 모양새가 달라 심심하지 않다. 어떤 문은 이가 맞지 않다. 바닥은 삐거덕댄다. 전원주택이라는 말보다 그냥 '촌집'이 이렇지 싶다. 그런가 하면 투박한 미적 감각도 드러난다. 황토벽에 층층이 박힌 기와는 물결 무늬처럼 박진감이 있다. '집은 사는데 편리하면 된다'고 기씨는 말했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또 끝내주니더."
3개월 만에 완성했다는 별채는 운치가 돋보인다.
"산이 낮은데 집이 높으면 되겠습니까. 주변의 풍경이 낮으면 집 안에서 보는 시선도 낮아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쯤되면 철학이다. 다실로 쓰는 별채에 앉아 보면 연못과 들판이 펼쳐진다. 봄이 되면 저 차 밭에 새순이 파릇파릇할 게다.
평상에서는 황토염색한 아이들 옷가지가 한참 햇볕을 쬐고 있다. 그 아래에는 상추, 참외를 심는 작은 텃밭이 있다. 널찍한 잔디 마당에서는 얼마전 지인들을 모아놓고 아들 돌잔치 겸 음악회도 열었다.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이 빠질 수 없다. 기씨는 내남면 일원에 사는 예술인들로 구성된 '손만사'(손으로 만드는 사람들) 회원이다. 서승암(목공예), 정성환(도자기공예) 씨는 자주 그의 집을 들르는 벗이다.
그의 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가족'이다. 2년전 결혼한 아내(31)와 쌍둥이 아들(15개월)은 마치 화가 박수근 그림에서 나온 것처럼 정겹다. 황토가 낱알낱알 만져진다.
10년전 기씨는 그런 가족들을 떠올리며 집 짓는 내내 흐르는 땀도 기뻐했을 것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집에서 사는 우리는 과연 그래 본 적이 있는가.
글·최병고기자 cbg@msnet.co.kr
사진·정재호편집위원 newj@msnet.co.kr
사진: 집 주변의 풍경이 낮으면 집 안에서 보는 시선도 낮아야 한다는 기현철 씨의 경주 내남 주택. 손수 지은 나지막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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