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25)'대구 10.1 사건'

1946년 10월에 발생한 '대구 10.1사건'은 갑년(甲年)이 되는 지금까지도 몇 가지 해묵은 논점들을 지니고 있다. 첫째 사건의 성격이 '폭동'이냐, '항쟁'이냐는 문제이다. 우파와 관변(官邊)은 서슴없이 '폭동'으로 규정지어왔다. 반면에 좌파와 일부 수정주의자들은 '인민항쟁'이란 변함없는 주장이었다. 이런 대척점을 피하기 위해 일부에선 '폭동' 대신 '소요'로, '항쟁' 대신 '봉기'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여기에도 논쟁의 요소는 많다. 그 결과 폭동의 요소와 항쟁의 요소가 때와 곳에 따라 혼재되어 있어 한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결론도 있다. 따라서 '대구 10.1사건'이란 가치중립적인 표현도 쓰곤 하지만 이 역시 좌우의 불만 섞인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둘째의 논점은 '사건'이 과연 공산주의자들의 지령에 의해 발생했느냐, 지령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였고, 중앙당이 개입했느냐는 문제이다. 이 해답에 따라 '폭동'인지 '항쟁'인지가 가늠될 듯하다. 여기에 대해선 미군정하 법원이 내린 '사건주모자'에 대한 판결의 결과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미군정은 사건 직후 대구인민당간부 최문식(崔文植)과 대구조선공산당의 간부인 손기채(孫基採), 김일식(金一植), 박일환(朴日煥) 등을 배후조종자로 구속했다. 그러나 법정공방 끝에 박일환은 무죄, 손기채와 김일식은 집행유예, 최문식 만이 징역 3년의 판결을 받았다. 또 9월 총파업의 대구주동자로 지목된 대구노평위원장 윤장혁(尹章赫)만 미군사법정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을 뿐, 함께 구속되었던 이선장(李善長), 배승환(裵昇煥), 이목(李穆), 마영(馬英)등 대구의 좌익유력인사 대부분이 무죄로 풀려났다. 다만 최무학(崔武學)등 학생대표들에게 중형을 선고한 것으로 보아, 공산당의 조직적인 지령이라기보다, 일부 대구학생조직과 노동조직, 소수 좌익강경파들의 충동적인 부추김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었음을 시사했다.

셋째의 논점은 당시 일선치안책임자였던 이성옥(李成玉)대구경찰서장이 사건수습에 확고한 의지를 지녔더라면 작은 희생만으로 초동단계에서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왜 쉽게 손을 들었느냐는 점이다. 결국 이 서장 자신과, 그 윗선인 권영석(權寧錫) 5관구 경찰부장의 친일열등감이 무기력하게 일부 폭력시위대들에게 무기고를 넘겨준 셈이었다. 무기를 손에 넣는 순간 선량했던 시위대의 일부가 '폭도'로 돌변한 것이었다. 친일파의 재등용은 결과적으로 민중을 위해서나 미군정 자신을 위해서도 패착이었다.

사건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안동출신 독립투사 유림(柳林)당수가 이끌던 '독립노동당'의 견해가 비교적 중도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1) 악질경관, 악질모리배의 횡행에 대한 반감. 2) 양곡수집과 처분에 대한 반감과 회의심.

3) 비애국적 공산주의자의 모략선동. 4) 독립지연에 대한 민중반발심의 발작.

이 중 특히 '비애국적 공산주의자의 모략선동' 이란 뼈 있는 지적은, 이 사건을 '항쟁'이라 주장하던 공산계열들에겐 적잖은 타격이 되었다. 또 한민당의 고위간부 조헌영(趙憲泳)이 "일부 경찰과 하곡수집에도 원인의 일단은 있었지만, 일부 폭력세력들이 포함된 극열파괴분자들의 모략선동이 주 원인이었다"고 내린 조사결론도 새겨 볼만했다.

대구. 경북에서만도 경찰관 60명, 민간인 54명의 사망자와, 6천여 명의 피검자, 1500명의 수감자를 낸 이 사건을 계기로 남조선 전역이 폭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사건 이후 한때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란 달갑잖은 평판도 들어야만 했다. 무엇보다 이 '10.1사건'을 기점으로 이 땅 위에 상잔의 유혈극이 본격화 되었다는 점에서 대구역사상 회상하기 가장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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