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과 폐지를 오가던 출자총액제한제도(이하 출총제)가 다시 존폐의 기로에 섰다. 대통령과 공정거래위원장, 재경부 차관 등이 경기 부양을 위한 대안 검토를 밝힌 데 이어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출총제 폐지를 촉구 또는 약속하고 나서면서 올 하반기는 존폐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울 전망이다.
출총제는 장기 불황, 재벌의 소유구조, 기업의 투자 축소 등과 맞물려 곳곳에서 언급된다. 자산, 투자, 재벌 등의 개념조차 취약한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우리 경제의 방향을 바꿔놓을 만큼 중요한 사안이므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경제, 경영, 법학 등의 학과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출총제란
공정거래법에 따라 대기업들이 다른 회사에 출자할 수 있는 한도를 정해 주고 그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제도다. 자산총액 합계액이 6조 원 이상인 기업집단에 속하는 기업은 회사 순자산의 25%를 초과해 다른 국내 회사에 출자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기업집단(재벌)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막는 역할을 하지만 기업의 투자 위축, 경영권 확보 위기 등의 부작용도 존재한다. 이 제도는 1987년 도입됐다가 외환위기 때인 1997년 폐지됐다. 기업 퇴출과 적대적 인수합병을 어렵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적대적 인수합병이 일어나지 않고 재벌의 계열사에 대한 내부지분율이 증가하는 등 부작용이 일어나 1999년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면서 부활, 2002년 4월부터 다시 시행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재벌 개혁이냐 경제 흐름이냐 가운데 어디에 중점을 두는가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다.
▶투자 확대의 걸림돌은 제거해야
경제계와 폐지론자들이 주장하는 출총제의 문제점은 몇 가지로 정리돼 있다. '기업의 신규사업 진출, 구조조정 등에 직접적인 제약을 가해 기업으로 하여금 업종, 투자규모, 구조조정 방법 등 경쟁의 최적 수단을 선택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경영권 방어 장치가 별반 없는 상태에서 우리나라 알짜 기업들을 역차별해 외국기업의 적대적 M&A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키게 한다.'(신문 칼럼)
경제계에서는 기업들의 바람을 대놓고 떠든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대기업 200개를 대상으로 출총제가 기업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결과는 당연히 부정적이다. 27%가 직접적인 애로요인이고, 66%가 잠재적 애로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이 말하는 애로는 유망기업 혹은 구조조정기업 등의 인수 애로(41.9%), 협력업체 등에의 출자 애로(34.4%), 합작 등 외국인 투자기업과의 관계 애로(21.0%) 등이었다. 출총제가 폐지돼도 시장과 시민단체 등의 감시기능이 활성화돼 있어 부작용이 크기 않을 것이라는 응답이 73.5%를 차지했다.
시대적 상황의 변화를 고려하라는 주장이 당연히 뒤따른다. '문제는 출총제 도입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재벌기업의 지배구조 역시 시장이 수긍할 정도로 개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결재무제표 등을 통한 감시 기능도 대폭 보완되었다. 또 정부도 필요에 따라 여러 예외규정을 설정하는 바람에 출총제 자체가 이미 누더기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신문 사설)
재벌을 규제하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선진국에 재벌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진국 대기업의 이사회는 거의 예외 없이 90% 이상을 사외이사로 두고, 일 못하는 CEO, 즉 주주 전체에게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는 CEO는 갈아치운다. GE와 한국 재벌의 차이는 단 하나다. GE는 CEO가 일을 잘 못하면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재벌을 없애면 출자총액제 같은 것은 있을 필요가 없다.(중략) 지금의 재벌들을 그대로 놔두고 마음껏 활동하게 하라. 단 사외이사가 이사회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도록 하고 이사들로 하여금 대주주 한 명이 아닌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이사책임제를 강화하면 된다.'(신문 칼럼)
▶유지 또는 정책 대안부터 마련해야
출총제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정부 내에서 대안이 검토돼 왔으나 지난 5월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열린우리당이 조속한 폐지를 촉구하고 나서면서 분위기가 급박해졌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출총제와 재벌개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각계가 참여한 시장개혁 선진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지난달 초 첫 회의를 가졌다. 이런 시점에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여당의 움직임이 보기 좋을 리 없다. '이미 공정위 산하에 TF가 꾸려져 출총체 폐지 여부와 폐지될 경우의 대안에 대한 논의가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여당이 섣불리 출총제 폐지를 언급하는 것은 TF의 구성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다. TF에서 도출된 방안이 결국 당정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논의의 폭을 제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참여연대 논평)
경실련, 참여연대 등은 '재벌 총수 일가의 과도한 지배력 집중 및 남용을 견제할 어떤 정책적 대안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총제 폐지를 떠드는 것은 재벌의 나팔수로 나선 꼴이라고 비판했다. 현실적인 문제점에 대한 자료는 때맞춰 공정위가 내놓았다. 공정위가 발표한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현황에 따르면 총수 일가가 9.17% 지분으로 39.72%의 의결권을 행사하는 등 지배구조는 여전히 왜곡돼 있다. 계열사의 자금과 재벌 소유 금융사에 맡겨진 고객의 돈으로 계열사의 지분을 매입해 지배권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정부여당이 앞세우는 투자 확대를 위한 폐지 불가피 논리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재벌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것은 서민 경제를 외면한 채 재벌을 위한 경제정책으로 일관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투자를 늘릴 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출총제 폐지를 미끼로 하여 강제투자를 이끌어 내면 이후 돌아올 국민 경제의 부담이 온당 서민들에게 지워질 것은 자명하다.'(민주노동당 논평)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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