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 고이즈미의 도발

8월 15일,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개인적 행동도 아니고 돌출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 우파의 신념을 대변하는 것이며 면밀히 계산된 도발이었다. 이는 일본은 더 이상 전범국가가 아니라는 국제적 선언이었다. 어쩌면 패전 후 60여 년간의 일본의 와신상담과 은인자중(?)은 이제 끝났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선언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분명 심상치 않은 사건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우리는 그 이면을 좀 더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고이즈미는, 신사참배는 한국과 중국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일본 전몰자에 대한 추모는 마음의 문제이며 그에 대해서 다른 나라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이즈미의 신사참배를 지지하는 일본 국민들의 경우도 '신사참배는 외국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는 것을 지지이유로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본의 고유한 종교적, 문화적 신념에 대해서 외국이 간여할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자. 일본의 종교적 문화적 자주성을 그렇게 옹호할 것이라면 남의 자주성도 당연히 존중해야할 것이다. 남의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빼앗고 남의 나라를 침략했던 사실에 대해서 당연히 사과하고 반성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니까 남의 자주성을 짓밟는 것은 괜찮고 자신의 자주성은 결코 훼손되어서 안 된다는, 이 기묘한 국가주의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고이즈미는 역사 왜곡문제에 대해서도 이런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각국마다 각각의 역사와 전통이 있으며.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는 것으로 일본의 역사왜곡을 옹호했다. 이 말에 중요한 복선이 깔려 있다. 이 말을 흘려들으면 문화적 다양성을 말하는 것으로 들리지만 전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과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범자일지 몰라도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범자가 아니라 전몰자이며 애국자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애도는 일본 국민의 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범으로 보는 것은 한국과 중국의 입장이고 일본의 입장은 그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라마다 역사가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고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한국과 중국의 입장에서는 침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진출로 볼 수 있는 것이며 일본이 자신의 국가적, 민족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그에 충실하게 역사를 보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것이다. 역사는 어차피 입장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에 좋고 일본에 유리하면 그만인 것이지 다른 나라들의 고통과 피해는 알 바 아니라는 그런 이야기다. 그야말로 자기중심적이고 자폐적인 역사관, 加虐的(가학적) 역사관, 역사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민망한 역사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점도 우리는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이란 것은 방법론이나 이론적인 문제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다. 일제의 침략과 전쟁을 미화하고 정당화한다는 것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범죄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 같은 왜곡이 가능한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참배나 역사왜곡이 지니는 문제의 심각성도 바로 그 점에 있다. 범죄자가 범죄에 대한 자기 반성력이 없고 범죄 의식이 없다면,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한다면 범죄의 재발 가능성은 높기 때문이다. 고이즈미의 최근 발언을 보면 그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고이즈미는 정상회담을 거부한 한국과 중국정부에 대해서 오히려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런 소리는 선전포고를 앞둔 적대국을 향해서나 하는 소리이지 일반적 국제 외교관계에서는 그 전례가 없는 소리일 것이다. 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소리에 다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우려해왔던 것처럼, 아시아평화를 위협하는 먹구름은 일본에서 다시 피어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포스트 고이즈미 내각이 들어서도, 야스쿠니 신사문제를 어느 정도 변통할지는 모르지만, 일본 우파의 집권은 변함없을 것이며 그들의 역사인식도 고이즈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기에 더욱 우려스럽다.

배영순(영남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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