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어려운 이웃들 삶에 온기…'연탄은 사랑입니다'

저는 300원짜리 연탄입니다. 2006년 11월 9일 오전 11시 3분, 대구 동구 율암동 대구연료단지 내 대영연탄 공장에서 몸무게 3.6kg에 25개의 구멍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강원도 장성 탄광에서 중앙선 화물차를 타고 이곳에 온 뒤 3분 만에 무연탄에서 흩날리지 않는 연탄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뱅글뱅글 도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20년 경력의 김모(54)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1천200여 친구들과 함께 25년째 연탄 배달을 하고 있는 김영경(50) 아저씨의 1t 트럭에 실렸습니다.

쉽게 깨지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아저씨는 시속 40㎞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흘렀을까, 서구 원대동의 한 음식점에 도착했습니다. 저희를 원한 분은 이형인(50) 아저씨. 중국집 사장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기름 대신 우리를 때며 아낀 돈으로 홀몸노인과 장애인 등 무려 700여 명에게 한 달에 한 번 자장면을 무료로 대접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루 20장, 6천 원어치의 연탄을 때는 아저씨는 "등유를 쓰면 난방비가 하루 1만 원을 훌쩍 넘는다."며 "난방비를 아껴 자장면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아저씨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입니다. "평생 못 입고 못 먹는 사람들 돕는 게 소원"이라고 해 검은 눈물을 흘릴 뻔했습니다.

600명의 친구를 내려주고 서구 비산동의 한 여인숙에 갔습니다. 대구 쪽방상담소의 주문으로 다시 400명의 친구들이 쪽방생활자들에게 무상으로 배달됐습니다. 천영익(28) 대구쪽방상담소 실장은 친구들이 다 내리자 쪽방 주인과 흥정을 했습니다. "월세에서 연탄비를 빼달라."는 천 실장님의 부탁을 듣는 순간, 또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월세 10만 원을 구하지 못해 밥을 굶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서랍니다.

남은 친구들과는 함께 둘 공간이 없어 적게 주문한 여러 가정들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는 서구 원대동의 한 자취방으로 실려가 지난 외환위기 때 실직해 혼자 살고 있는 박모(53) 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사업이 망하면서 수감생활을 했고 그로 인해 정서장애와 간질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립선 비대증과 유루증(流淚症:눈물이 넘쳐 흐르는 증세) 등으로 하루 네 봉지의 약을 먹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박 씨는 10년 전 암으로 죽은 아내와 큰집으로 입양 보낸 딸 이야기때는 유루증 때문이 아니라 정말 눈물을 철철 흘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서 이 아저씨와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어졌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안도현님의 '연탄재'라는 시 아시죠? 저는 아저씨의 연탄재가 되고 싶어 아궁이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까만 몸을 하고 300원짜리로 태어났지만 저를 원하는 이들에겐 300만 원, 3천만 원의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하얀 재로 변해 갑니다. "아저씨들, 희망 잃지 말고 꿋꿋하게 지내십시오."

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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