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박기섭
사람 사는 세상, 살 비린 이 푸줏간에
저마다 몇 근씩의 생육을 찢어 놓고
느긋이 피를 말리는, 오오 눈부신 참형의 시간
그래, 그런 날은 갓 맑은 저 하늘에
성긴 모시올 같은 밑줄이나 긋고 살지
뒤척여 몸서리치는 피멍서껀 삭이면서
이 가을 내 공양은 식은 차 한 잔뿐
해묵은 뉘 안부를 마른 나무에나 묻고
사무쳐 옹근 마음도 이냥 헐고 말겠네
이제 이 지상의 노래는 식어 숯이 되고
끓는 불잉걸로도 어쩌지 못할 오한만이
온 산천 시퍼런 적막을 대지르고 있으니
가을은 '저마다 몇 근씩의 생육을 찢어 놓고/ 느긋이 피를 말리는' 계절이다. 모든 생물이 전신을 말리는 계절이다. 그야말로 '눈부신 참형의 시간'이다. 그래, 이런 계절에 그대는 무엇을 더 가지려 하는가. 모든 것을 털어야 하리. 그 누구에겐가 '사무쳐 옹근 마음도 이냥' 헐어야 하리. 보라, 푸른 나무 아래 젊음의 열정으로 부르던
'지상의 노래는 식어 숯이 되'고 있지 않는가. '끓는 불잉걸로도 어쩌지 못할 오한만이/ 온 산천 시퍼런 적막을
대지르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만물이 저물어 가는 계절이다.
이 가을에 그대여, 또 무엇을 탐하고 있는가. 그대도 속절없이 저물어 가고 있지 않은가.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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