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인적자원부가 공청회를 통하여 공개한 교육과정 개정안은 수많은 논쟁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논쟁을 겪으면서 교육과정 개정은 합리적인 숙의와 논의의 성격보다는 교과 관계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권력 투쟁의 성격을 더 많이 지님이 부각되었다.
교과 관계자들은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마다 각 교과 교육과정의 개발보다는 총론의 편제표에서 각 교과의 위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 왔다. 교과 전담제를 실시하고 있는 중등학교의 교육과정 개정에서 이러한 현상은 특히 두드러졌다.
교육과정 개정 때마다 교과의 요구는 넘쳐난다. 국가 교육과정에서 교과목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다양한 영역들이 교과의 지위를 얻고자 해당 교과목의 신설을 요구한다. 일단 교과목의 지위를 확보하면 필수 교과목의 지위를 요구한다, 필수 교과목의 지위를 확보하면, 수업 시수를 늘려 줄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교과는 항상 스스로를 확대 재생산하는 경향성을 지니며, 스스로를 줄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교육과정 개정과 관련하여 각 교과 전문가들에게 학생들이 해당 교과를 얼마나 많이 공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지 조사한 적이 있다. 각 교과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교과 수업 시수를 합하면 학생들은 적게는 현재보다 1.5배에서 많게는 3, 4배를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선진국의 학생들에 비해 현재에도 더 많은 교과를 공부해야 하는 실정이다. 6, 7차의 교육과정 개정을 통하여 학생들이 학기당 이수해야 하는 교과목의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생들은 여전히 선진국보다 더 많은 교과목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 학생들은 대입을 앞둔 고등학교 2, 3학년에서도 학기당 11과목 정도를 공부한다. 학기당 5~8과목 정도 공부하는 선진국 학생들보다 훨씬 많은 편이다.
교육인적자원부는 고등학교 2, 3학년 과정에서 학생들이 이수해야 하는 필수과목 수를 늘리는 방안을 발표하였다. 개정안에서는 기술·가정, 체육, 음악·미술을 필수로 이수하도록 하였다. 물론 입시위주의 교육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 특기·적성을 길러줌으로써 인성교육을 강화하자는 취지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목 조정의 배후에는 관련 교과의 로비나 압력이 있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왜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마다 각 교과는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투쟁을 전개하는가? 정치적인 투쟁을 통하여 교육과정의 지형을 바꾼 전례가 있으며, 각 교과 관계자들이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정 개정이 사실적인 자료의 분석, 합리적인 숙고와 논의를 통하여 결정되기보다는 교육계 안팎의 정치적 개입이나 투쟁을 통하여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교육계에서는 상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교육과정 개정이 정치적인 투쟁의 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물론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 정치적인 투쟁을 중단해 달라고 호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정 방향에 따라 각 교과별 이해관계가 심각하게 달라질 수 있는 현실에서 이들에게 정치적 개입을 중단해 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교육과정 개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조건이 갖추어질 필요가 있다. 첫째, 교육과정 개정은 확고한 교육 철학에 기초하여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10년간의 공통 교육과 2년간의 선택 교육을 실시한다는 국가 교육과정의 개정 원칙이 설정되었다면, 이러한 원칙에 충실하게 교육과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공통 과정에서는 모두에게 필요한 교과를 전인교육의 차원에서 균형있게 부과할 필요가 있다. 선택 과정에서는 개인의 관심과 진로를 고려하여 학생이 필요한 교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하도록 허용해야한다. 선택 과정에서 학생들의 균형 있는 교과목 이수를 위하여 특정 교과목을 필수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교육과정 개정시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합리적이고 투명한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특정한 방향으로 정책 결정이 이루어졌다면 누구에 의해 어떤 절차를 거쳐 어떠한 논거에서 정책 결정이 이루어졌는지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셋째,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 학생들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교육은 학생을 위한 활동이며, 따라서 교육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교육적 유익을 위한 것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김재춘(영남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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