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봄 편지-봄꽃

겨울에 봄을 짐작하기도 어렵지만, 봄에 겨울을 기억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어김없이 맞이하는 봄이지만, 늘 새롭다. 봄이라고 하기엔 좀 이른 듯 하고, 겨울이라고 하기는 열없는 꽃이 매화다. 매화는 묵은 가지에 잎보다 꽃이 먼저 1∼3송이씩 핀다. 한 송이로 피지만 떨어질 때는 꽃잎이 하나씩 하나씩 바람에 흩어진다. 매화 지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살이를 두고 '같은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겠다.' 던 월명사의 '제망매가'가 생각난다. 복사꽃 벚꽃도 한 가지에 태어나, 한 잎씩 떠나간다. 한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알 수 없는 것이 어디 꽃잎뿐이겠는가.

◇ 봄을 알리는 전령들

개나리와 산수유, 생강나무는 이른봄에 잎보다 먼저 노란 꽃이 피는 나무다. 개나리는 분별이 쉽지만 산수유와 생강나무는 엇비슷해 꽃잎만 보면 그게 그 꽃 같다. 산수유나무는 나무껍질이 거칠고 생강나무는 껍질이 매끈하다. 산수유는 큰키나무이고 생강나무는 떨기나무(뿌리에서 가는 줄기가 올라와 잔가지가 더부룩하게 자라는 나무)라는 점도 차이점이다. 추천할 일은 아니지만 가지를 꺾었을 때 생강냄새가 나면 생강나무다. 그래도 어른들은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데 대여섯 살 먹은 아이들은 그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문자를 익힌 어른들은 모양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데 반해 문자를 모르는 아이들은 모양을 유심히 살피기 때문이다.

목련꽃은 사람을 황당하게 만든다. 해마다 이른봄이면 '지금쯤 목련이 피겠지….'하고 기대를 하는데, 어느 순간 활짝 피었다가 금방 거무튀튀하게 시들어 있다.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리는 것 같다. 시퍼렇게 눈을 뜬 채 송이째 툭 떨어지는 여름날 능소화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피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는 목련꽃을 보고 있자면 이 꽃이 너무 급하게 피는 것인지, 너무 서둘러 지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한두 해도 아니고 매년 그 모양인 것을 보면 그게 목련의 생리이고 자연사인도 모를 일이다. 자연사가 아름답게만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그 고통스럽고 긴 마지막 때문일 것이다.

◇ 봄 맞으러 가야지

천지가 봄인 시골에서는 일부러 봄을 맞이할 필요가 없지만, 도시에서는 봄도 마중을 나가야 한다. 이맘 때 근교 화훼단지는 봄 맞으려는 사람들로 바쁘다. 봄을 즐길 줄 아는 쪽은 확실히 여성이다. 아내 뒤를 엉거주춤 따르는 남자 손님들의 모습은 여간 어색하지 않다.

봄꽃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세월 보내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꽃은 해 뜰 무렵,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해 질 무렵에 다르다. 햇빛이 좋은 날과 햇빛이 없는 날이 다르다. 바람이 불 때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화훼단지 비닐 하우스 안에서 볼 때, 바깥에서 볼 때 다르다. 베란다에 핀 꽃이 다르고, 거리의 화단에 핀 꽃이 다르다. 그 꽃이 그 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야박하거나 무심하다.

화훼단지에서 만난 중년 여인은 쪼그려 앉아 꽃을 구경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 사람이 이런데 취미 붙이지 마소. 맨날 와야 합니다.'

그녀는 이번 주에만 2번 왔고, 벌써 다섯 시간째 둘러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한창 일할 나이의 사람이 꽃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충고는 경험에서 나온 진심일 것이다.

쪼그려 앉아 꽃구경을 하다가 집에서 늘 보는 꽃기린을 만났다. 꽃기린은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꽃잎에 손톱 만한 꽃(붉은 꽃 혹은 흰 꽃)을 봄부터 가을까지 피우는 꽃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는 겨울에도 꽃을 구경할 수 있다. 꽃기린은 기대보다 많은 꽃을 피워 사람을 들뜨게 하더니, 욕심보다 적은 꽃을 피워 절제를 알게 한다.

도심 길가 화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팬지다. 팬지꽃에는 큰 팬지와 미니팬지 두 종류가 있는데 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팬지는 큰 팬지다. 팬지꽃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게 있었다. 길가 화단에 팬지를 많이 심는 이유가 뭘까? 팬지꽃이 다른 꽃보다 키우기가 쉬운가? 값이 싼가?

꽃가게 주인은 값은 같다고 했다. 한 포기 500원. 팬지가 추위에 강한 편이기는 하지만 다른 꽃보다 특별히 키우기가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고 했다. 화훼단지에서 다른 꽃과 나란히 서 있는 팬지를 보고 나서야 거리 화단에 팬지꽃이 많은 이유를 알았다. 팬지는 다른 꽃보다 꽃잎이 유난히 컸다. 나란히 서 있는 패랭이꽃과 종이꽃에 비해 적어도 3배, 5배는 컸다.

그러니 봄이 왔음을 알리는데는 팬지가 제격이다. 말하자면 팬지는 봄을 알리는 요란한 꽹과리 소리인 셈이다. 요란하지 않으면 쳐다보지 않으니 말이다. 막 개업한 가게들이 홍보 도우미 아가씨들을 불러 노래 부르게 하고, 춤 추게 하는 까닭도 거기 있다.

◇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

꽃 파는 처녀에게 물었다.

'화초를 잘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두고 물 적당히 주면 됩니다."

'그 정도야 저도 알죠….'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래도 죽던데요?'

말해놓고 보니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 정도조차 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는 것은 인삼뿐만이 아니다. 생명을 키울 요량이면 발자국 소리를 들려줘야 한다.

"집에 화분을 사오면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작은 화분에 심어진 것들은 뿌리 부분에 줄로 묶인 경우가 많아요. 고정시키려고 지지대를 만들어 둔 것인데, 그 줄을 얼른 풀어주고 좀 큰 화분에 옮겨주면 잘 자랍니다. 화분을 옮기고 나면 처음 며칠 간 호되게 몸살을 앓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주는 편이 좋아요." 꽃 화분 한 개 사들고 떠나던 중년 부인이 쪼그려 앉아 꽃구경하는 기자에게 들려준 말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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