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불행은 또 다른 행복의 시작

최근 인터넷 검색 중 희귀 질환 관련 사이트에서 과거 나에게 진료 받았던 한 낯익은 환자의 이름을 우연히 발견했다. 여대생이었던 환자는 월경이 없어져 병원을 방문했으며 태어날 때부터 입술과 잇몸이 결손된 선천성 기형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원인 조사를 위한 여러 가지 검사에도 불구하고 무월경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어 고민하던 중, 환자의 어머니로부터 자신은 양어머니이며 친어머니는 현재 알코올 중독자 수용 시설에 입원해 있으며 환자를 임신 중에도 알코올 중독 상태였다는, 진단에 결정적인 사연을 듣게 됐다. 예상대로 환자의 증상은 태아 알코올 증후군이란 희귀 질환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이런 선천성 질환은 뚜렷한 치료방법이 없긴 하나 생리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약물 치료를 해 보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자가 진료 의뢰서를 써 달라고 해 사정을 물어 봤더니, 자신의 병을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병원비가 많이 들어 고민이었는데 모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사연을 소개하면 무료로 검사를 해 준다고 해 방송에 출연할 예정이라고 했다. 얼마 뒤 다소 실망스런 표정으로 다시 찾아온 그 환자는, 재검사 결과도 같았다며 비록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아직도 믿기진 않지만 이번 출연을 계기로 방송국으로부터 음주 피해의 심각성을 알리는 홍보 캠페인에 출연을 제의받았고 자신과 같은 환자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흔쾌히 출연을 결심했다고 했다. 나에게도 함께 출연해 도와달라고 제안했는데 내 전공 분야가 아니고 바쁘다는 핑계로 비록 그 부탁을 거절했지만, 자신의 치부를 알리고 싶지 않을 감수성 여린 여대생의 용기가 대견스러웠다.

그 뒤 이 환자는 질병 정보의 공유와 서로간의 위안을 위해 전국의 환자들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사망 했는데 그래도 성장해서 대학까지 진학한 자신은 얼마나 행복한지 알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환우들의 아픔과 고통을 덜기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이 친구는 환우회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고 정부에 태아 알코올 증후군을 희귀 질환으로 등록하고 검사 및 치료비를 보조받을 수 있도록 많은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얻은 불치병에도 실망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계획하고 실천했다.

이 일은 질병의 진단과 치료라는 소극적인 의사의 역할에 쫓겨 살면서 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며칠 전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희귀 질환 수기에 당선한 이 친구의 사연을 보면서 이 친구가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이트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아직도 왕성한 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희귀 질환 환우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후원을 받는 일을 자원해서 하고 있었다. 또 '삶의 불행은 또 다른 행복의 시작'이라며 자신에게 오히려 고통과 불행의 운명을 가져다 준 세상을 위해 앞으로 사회 복지사로 봉사하고 싶다는 포부를 알게 된 순간, 부끄러운 내 자신을 돌이켜 봤다. 환자를 심리적으로 지지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 해야 할 의사로서 책무를 지키며 살고 있는지.

윤현대(라파엘내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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