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이맘때였다.
연해주 넓은 들은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전란과 일제를 피해 정착한 고려인들이 피땀으로 일군 농토였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이민족 분리 정책에 따라 18만 4천여 명이 추수도 하지 못하고 낯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참혹한 40여 일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라스똘역에서 출발해 화장실도 없는 가축용 시베리아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렸다. 그 과정에 1만 5천여 명이 굶주림과 추위로 사망했다. 시신을 차창 밖으로 던지는 것이 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장례식이었다.
손에 들 수 있을 정도의 식량밖에 가져갈 수 없었던 이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반사막 지대에 분산 배치돼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이 와중에 고려인 5분의 1이 사망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면서 고려인들은 유라시아 유목문화에 벼농사를 접목하여 성공적인 정착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쫓겨난 지 55년 만인 1992년 구소련이 15개 독립국가로 와해되면서 이들은 또다시 국적 없는 난민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각 민족 언어를 국어로 통용하면서 차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족적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려인 약 10만여 명이 연해주로 재이주를 시작했다.
올해는 신한촌 건립 100주년, 연해주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신한촌은 1860년부터 블라디브스토크 중심가에 살던 고려인들이 러시아 정부에 의해 2, 3km 떨어진 외곽에 새로 건립한 고려인 집단거주지다.
지난달 30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80여km 떨어진 아르촘에서 '제6회 연해주 고려인 문화의 날' 행사가 열렸다.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가을 운동회 같은 날이다. 여기서 만난 방 이리나(73) 할머니는 구소련이 붕괴되는 해인 1992년 연해주로 이주했다. 세 살에 우즈베키스탄행 강제이주 열차를 탔지만 용케 살아남아 해바라기씨를 시장에 내다팔면서 근근이 살아온 것이 70년이 지났다.
그러나 연해주로 이주한 지금도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다. 여전히 국적은 없고, 경제적으로는 힘들다. "한국이 잘 산다고 하는데 돈 좀 주면 안되냐?"며 간절한 눈빛으로 얘기했다. 현재 무국적 고려인이 7만여 명에 달한다. 한국말을 하지만 한국인이 아니고, 러시아에 살고 있지만 러시아인이 아니다. 평생을 중앙아시아에 살았지만 그쪽 나라 사람도 아닌 기구한 역사의 희생자들이다.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 회장인 리 비아체슬라브 씨는 "벌금을 물면서 어렵게 사는 고려인들이 대부분"이라며 "국적을 취득할 돈이 없다."고 했다. 독립국가로 분해되는 와중에 살던 곳을 떠나는 바람에 국적 취득에 필요한 서류를 챙길 수 없었다. 지금도 살던 곳으로 가서 근거서류를 발급받을 수는 있지만 비용이 1만 5천 루블(한화 60만 원)이 넘게 든다. 단돈 10루블(4천 원)도 없는 이들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지난 2일 블라디보스토크 현대호텔에서 경북대 한국교민연구소(소장 배한동)와 우리함께 운동본부(이사장 이대섭) 주최로 '신한촌 건립 100주년 및 연해주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경북대의 배한동 김광기 김영하 교수와 한 알렉산드라 러시아 고려인협회장, 이춘웅 연해주 이산가족협회장 등이 참여한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현재 고려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허심탄회한 토론이 이어져 눈길을 끌었다.
이춘웅 회장은 "러시아와 한국의 정부차원에서 연해주 고려인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며 "한국의 고유한 문화를 잊어가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센터라도 만들어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 알렉산드라 회장은 "고려인 단체도 많고, 한국에서 온 민간단체도 많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기관이 없다."며 "이른 시일 내에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해주는 러시아 정부의 전략 지역이다. 미국과 중국·일본을 견제하는 극동 기지이자 천연자원이 풍부한 교통 요충지다. 그러나 남한의 1.6배에 달하는 면적에 인구는 고작 228만 명이다. 러시아는 향후 2천만 명까지 인구를 늘릴 계획이다.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에도 적극적인 자세다.
한국으로서는 대륙 진출의 교두보일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통일 한국의 식량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식량창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필요한 지역이다. 배한동 교수는 "시베리아 대륙 횡단철도(TSR)를 통한 물량수출과 자원 외교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다."며 "고려인의 연해주 정착 지원에 관한 포괄적 제도 장치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지원도 절실하지만, 무엇보다 연해주 재외동포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는 것이 이날 학술대회의 요지. 한때 힘없는 조국을 가졌던 이들이 겪은 고통과 마치 외계인처럼 떠돌고 있는 그들의 유랑생활에 이제는 종지부를 찍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