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명의 백성도 그에게는 하늘이고 땅이고 우주였다."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세종대왕을 축약·표현한 문구다. 한글 창제, 측우기 발명 등 그 업적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민본주의'를 실천한 대왕에게 가장 적합한 문구란 생각이 든다. 곰팡내 나는 역사의 책갈피 속에 머물러 있었던, 또는 신화화돼 사람들로부터 거리감이 있었던 세종대왕을 친숙한 존재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드라마 '대왕세종'이 기여한 바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각설하고 별 고을, 성주 땅에는 세종대왕과 그 왕자들과 관련된 유적이 있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이다. 세종대왕의 적서 왕자들의 태를 묻은 이곳에서는 생명의 존귀함은 물론 권력 투쟁의 비애, 역사의 순환, 옳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백성들의 마음 등 다양한 소회를 느낄 수 있다.
#생명 존중의 표본, 태실!
성주읍에서 세종대왕자태실까지는 승용차로 20여분이면 족하다. 905번 도로로 월항으로 가 선석산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태실을 가기 전 태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답사에 큰 도움이 된다.
뱃속의 아이와 어머니를 이어주는 태(胎)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태아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태를 소중하게 다뤘다. 아기 배꼽에서 떨어져 나온 탯줄을 한지에 곱게 싸고 명주실로 꼼꼼히 묶은 뒤 안방 벽, 가장 높은 곳에 걸어두는 풍습이 흔했었다. 그만큼 태를 귀중하게 여긴 것이다.
하물며 왕자의 태는 국운과 관련 있다고 해서 갈무리하는 데 더욱 정성을 쏟았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자가 태어나면 태를 깨끗이 씻은 뒤에, 백자 항아리에 잘 보관했다. 그리고 이 항아리를 묻을 좋은 터와 날짜를 따로 잡아서 '안태식'이라고 하는 의식을 크게 치렀다.
태를 묻는 의식을 거쳐 왕자들의 태를 묻은 곳이 태실(胎室)이고, 임금의 태를 묻은 곳은 태봉(胎封)이라 일컫는다. 성주에는 태봉과 태실 3곳이 있다. 용암면 대봉리 조곡산에 조선 태종의 태를 묻은 태봉이 있고, 가천면 법전리 법림산에는 단종의 태를 묻은 태실이 있다. 그리고 월항면 인촌리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적서 왕자 17명의 태를 묻었다. 성주를 '태실의 고장'이라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주차장에서 계단 수십여개를 오르면 세종대왕자태실이 보인다. 현재 이곳에는 세종대왕의 적서(嫡庶) 18왕자 중 큰 아들인 문종(文宗)을 제외한 17왕자의 태실과 원손(元孫)인 단종(端宗)의 태실 등 모두 19기가 모셔져 있다. 왕자 한 사람에게는 두 개의 태실이 있어 왕자의 수보다 태실이 하나 더 많다. 숫자가 맞지 않는 것은 왕자 중 한 사람의 태실이 두개 이거나 왕실족보인 선원록, 실록 등에 수록되지 않으나 태어나 일찍 죽은 왕자의 태실이라는 설이 있다.
왜 이곳에 태실을 만들었을까? 태실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연꽃잎처럼 주변의 산들이 태봉(꽃봉오리)을 감싸 앉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문외한이라도 명당이란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태실의 재질은 화강암. 그 구조는 위로부터 연입을 새긴 개첨석이 있고, 그 밑으로 둥근 모양의 중동석, 다시 그 밑으로 네모난 모양의 연엽대석이 있다. 연엽대석 밑에는 태를 담은 백자 항아리를 보관하기 위한 석함이 묻혀 있다. 이 태실은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만들어졌다.
#파란 많은 역사를 품다!
태실 19기 가운데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다섯 기는 윗부분이 아예 없다. 금성대군 등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네모난 모양의 연입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돼 남아 있지 않은 것. 누구의 태인지를 알리는 빗돌(장태비)도 없거나 파손돼 있다. 수양대군의 동생들인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계유정란 때 죽은 안평대군까지 이 다섯 왕자들의 태와 빗돌을 모두 파헤쳐서 산 아래로 던져버린 것을 1975년에 다시 찾아내 이곳에 함께 앉혀 놓았다.
역사는 돌고 돈다 했던가.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태실은 즉위 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해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웠다. 하지만 동생들의 태실과 마찬가지로 세조의 가봉비 역시 수난을 당했다. 뒷날 세조가 저지른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이 빗돌에다가 오물을 붓고, 돌로 찧고 갈아서 망가뜨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조와 그 아우들의 훼손된 태실과 빗돌을 보면서 새삼 권력무상이란 네 글자를 떠올리게 된다.
숙부들의 태실이 있는 한구석에 서 있는 조카 단종의 태실도 우여곡절을 갖고 있다. 숙부들과 같이 묻혔던 단종의 태는 문종 때에 숙부들과 같이 있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여 가천 법림산으로 옮겼다. 하지만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고 강원도 영월에 유배됐다가 죽임을 당한 후 법림산의 단종태실은 철저하게 파괴됐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을 정도다. 본디 태실의 석물은 태를 옮길 때 같이 옮기지 않고 땅에 묻었는데 월항면에 있었던 단종태실의 석물은 땅에 묻힌 것을 다시 세웠다. 그런 탓에 수백년 세월 동안 이끼가 끼어 고색창연한 숙부들의 태실과 달리 단종의 태실은 표면이 비교적 깨끗한 상태다.
#생명 교육의 현장으로 삼아야
세종대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 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연구에 중요한 자료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생명의 표본인 태를 정성스레 갈무리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높였다는 측면에서 태실에 더욱 주목할 이유가 있다. 태실 문화는 우리 민족만이 갖는 고유한 문화이자 종합예술인 것이다. 세종대왕의 왕자 태실은 그 원형을 보존해 내려오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장태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란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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