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나 야구에서는 이겼다고 자위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또한 졌다고 생각할 때 반전이 고개를 치켜 든다. 이렇듯 오묘한 껍질 속에 가려진 승부의 이치를 알기까지는 뼈에 사무치는 순간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프로야구 초창기 몇 년 동안은 감독이 더그아웃에서 담배를 피워도 제지하지 않았다. 1984년 부임한 김영덕 감독은 더그아웃에 빨간 선(SUN) 담배를 5갑이나 가져 왔었다. 대부분 답답할 때 두 세모금 피우곤 했는데 경기 종반에는 바닥에 장초가 수북히 쌓였다. 그는 예민하면서도 필요한 지적 외에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 엄한 카리스마를 보였다.
그해 롯데와의 한국시리즈 7차전. 8회 유두열이 타석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이었다. 마운드에선 김일융이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었지만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정동진 수석코치와 유백만 투수코치가 김 감독 앞으로 다가가 투수 교체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김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몇걸음 옮기다가 휙 돌아서면서 뒤따르던 두 코치에게 한마디했는데 운동장의 응원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온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역전 스리런홈런이 좌측 펜스를 한참이나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국시리즈에서 패하고 이듬해 김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이상하리 만큼 달라져 있었다. 금연은 물론 의식적으로 코치나 선수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늘었고 자상한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해 1985년 부산 구덕구장에서 후반기 우승으로 통합 우승을 확정하는 순간까지 그는 내내 진지하게 지휘하며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2005년 6월10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선 60회 청룡기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산고의 에이스였던 류현진은 예상과 달리 초반에 무너져 버렸다. 창단 후 첫 우승을 바랐던 대구고의 타격이 불을 뿜으며 3회 들어 5득점으로 류현진을 강판시킨 것이다. 기세가 오른 대구고는 4회 들어서도 사사구 4개와 1안타에 도루 5개를 곁들이면서 추가 3득점해 8대0으로 앞서고 있었다. 그리고 8번 타자가 들어선 1사 만루의 상황이었다.
대구고 박태호 감독이 3루 코치 박스에서 스퀴즈번트를 생각하는 순간 그의 앞으로 동산고 최영환 감독이 투수를 교체하기 위해 마운드로 걸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떨구고 힘없히 걸어가는 최 감독을 보면서 한순간 박 감독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만하면 됐지, 뭐." 결국 그는 스퀴즈번트 대신 강공을 택했고 추가득점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시간 뒤 박감독은 천추의 한을 안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남쪽으로 옮겨야 했다. 야금야금 추격을 허용하다 10대8로 역전패를 당한 것이었다. 믿기 어려운 결과로 이어졌지만 그때부터 박 감독은 승부의 이치를 새롭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절치부심 노력해 3년 뒤인 올해 청룡기를 품안에 넣었다.
큰 댓가를 치른 교훈은 평생을 함께 하는 법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대구의 명예를 드높인 대구고 야구부와 박태호 감독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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