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일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켜지기 시작한 촛불이 40여일째 타오르고 있다. 촛불시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과거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제 촛불집회에서 '민주화' 구호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먹을거리 안전'이라는 일상적인 삶의 이슈이며 '행복하게 살겠다'는 극히 개인적인 욕망의 집단화이기도 하다. 촛불집회 현장은 축제가 됐고, 광장은 아이의 손을 잡고 나서는 친숙한 공간으로 변신했다. 왜 대중들은 이념과 계급 대신 생활의 이슈를 들고 광장으로 나선 것일까.
◆시위? No, 축제? Yes
저지선을 향해 다가오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물대포를 쏜다. 비명이 나올법도 하지만 난데없이 튀어나온 합창은 "온수! 온수!". 기왕이면 따뜻한 물로 뿌려달라는 얘기다. 경찰이 확성기를 잡고 경고 방송을 하려면 '노래해, 노래해'로 받아친다. 마이크를 잡으면 '개인기, 개인기'를 연호한다. 거리에서 격렬한 민주화 투쟁을 벌였던 이들이 보기에 촛불집회는 한마디로 '개판'이다. 주동자도 없고, 구심점도 없다. 깃발도 없고, 대오도 없다. 손에 쥔 가녀린 촛불 하나가 그들이 쥔 무기의 전부이고, '비폭력'이 행동 지침이다.
시위 행렬이 지나가는 곳곳은 놀이판으로 변했다. 지난 10일 대구 도심에서 열린 촛불집회 현장도 서울 광화문과 다르지 않았다. 무대에서는 힙합동아리가 거친 랩을 토해냈고, 대학생들은 지나가는 청소년들의 손을 잡아끌며 '여행을 떠나요'를 열창했다. 한 20대 여성은 갑자기 무대 위로 뛰어올라 섹시댄스를 추다 주최측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거리 한쪽에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동창들의 모임도 열렸다.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던 부모들은 아이들의 재롱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6천여명의 시민들이 벌이는 파도타기 응원도 장관이었다. 시민들은 빵과 음료수를 서로 나눠먹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축제가 됐다. 50일째 이어진 촛불집회는 시위의 틀과 방식, 내용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깃발이 없어도 시민들은 제발로 걸어나와 촛불을 켠다. 정치적, 이념적 구호보다는 건강하게 살 권리를 외친다. 생활 속 화두가 시민들을 끌어모은 자력(磁力)이다.
이처럼 시위의 행태가 드라마틱하게 변신한 이유는 무엇일까. 표정은 가볍고, 구호는 부드럽다. 반정부 구호는 인터넷 댓글처럼 직설적이면서도 기발하다. 인터넷의 감성이 오프라인으로 옮겨진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기존 정당정치와 대의정치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한다. 정당정치·이념정치에서 잡아내지 못한 생활 속의 이슈를 대중들이 직접 제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거리 시위는 이념의 도구가 되면서 불법화되고 대중과 소통에 실패한 경향이 있다"며 "퇴색한 거리 시위를 대중이 문화적 장으로 끌어냈으며 서구 유럽과 달리 시위에 놀이문화가 결합된 것은 우리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념을 넘어 생활 정치 시대로
과거 사회운동의 이슈가 민주화, 노사관계 등 거시적인 제도에 있었다면 이제는 먹을거리 안전에 연관된 미시적인 일상 생활이다. 대중들이 생활정치로 눈을 돌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대중들이 개인의 미래와 행복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민주화와 진보와 보수 등 이념, 지역 감정 등 거시적인 관점에서 대의정치의 명분을 찾던 대중들이 이제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일단락됐고 지역감정도 과거보다 상당히 희석됐다는 대중들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도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높은 지지를 얻은 데는 "저 사람을 선택하면 내가 잘먹고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심리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는 것.
지난 노무현 정권 시대의 피로감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과 정반대의 스타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을 설득하는 데 그다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사건건 국민을 설득하려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치지향적이었고 끊임없이 이념적 이슈를 양산한 데 대해 대중들이 피로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지금까지 대중들이 색깔론이나 지역감정, 선동 구호 등에 속아 자신의 이익을 실제로 대변하는 정책을 내놓는 정치집단을 지지해야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경향이 있다"며 "촛불집회를 통한 각성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맞는 정치 집단을 선택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시대적 상황에 피로감을 느껴 잘먹고 잘사는 문제에 집중하는 시대가 됐다는 논리다.
촛불집회가 위험정치라는 새로운 정치의 징후를 보여준다는 분석도 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7일 '촛불 토론회'에서 "오늘날 사회갈등의 영역은 전통적인 계급사회 쟁점에서 환경·생명·평화 등 위험사회(risk society) 쟁점으로 이동하고 있다"며 "경제적 삶의 향상에 못지 않게 자아실현, 삶의 안전, 양성평등과 같은 탈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정치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임운택 교수는 "이번 촛불집회는 참정권, 기본권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되새기고 교육하는 살아있는 현장"이라며 "불안하고 폭력적이며 이해관계가 얽힌 시위 문화에서 자유로운 참여정치가 보편화되는 소중한 정치 경험"이라고 말했다.
◆촛불은 언제쯤 꺼질까
촛불집회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촛불집회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데는 정부의 미숙한 대응 탓이 크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10대 청소년들의 불안감에서 시작된 촛불집회를 초기에 진정시킬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안의 심각성을 간과한 정부의 대응이 국민들의 불신만 키워놨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지적 수준은 높아진 데 비해 자율규제나 조직 검사 강화 등 국민들의 기대 수준에 못미치는 미봉책들로 인해 오히려 신뢰를 잃었다는 것.
촛불시위는 상시화, 장기화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고유가·고물가라는 팍팍한 경제 상황과 공기업 민영화, 한반도 대운하, 민영 의료보험제도 등 정부 정책에 대한 실망감이 맞물리면서 '정권 퇴진'이라는 거대 이슈로 발전된 탓이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오는 20일까지 쇠고기 협상을 무효화하고 전면 재협상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정부가 재협상 카드를 내놓을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이라 적어도 20일까지 촛불 시위가 계속된다는 의미이다.
정부의 '재협상' 카드나 이에 맞먹는 해결책을 내놓기 전에는 촛불집회를 그만둘 명분을 찾기 힘든 상황이다. 촛불 집회를 마무리할 수 있는 열쇠는 정부가 쥐고 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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