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런 우스개가 유행했다.
모녀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른 층을 계속 누르는 것이다. 딸은 "아빠, 다른 층 눌렀어!"라고 했다. 어두운 표정의 아버지가 서서히 고개를 돌리며 얘기한다. "내가 네 아버지인줄 아나?"
공포영화라고 하면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이나 '나이트메어'의 프레디와 같은 연쇄살인마를 떠올린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사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나온다. 멀쩡하던 아빠가 어느 날 미쳐서 도끼를 들고 죽이려고 덤비는 것만큼 소름끼치는 일이 있을까.
완벽주의 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 그려내는 공포가 그렇다.
산 속의 호젓한 호텔. 가을까지 사람들로 붐비지만 겨울에는 폭설로 문을 닫는다. 겨울 동안만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소설을 쓰는 잭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 고급스러운 호텔에서 제왕처럼 보내면 되는 휴가 아닌 휴가다.
폭설로 길이 끊기고, 이 호텔에는 잭의 가족만 남는다. 무료한 일상, 소설을 쓰는 잭의 타이프라이터 소리만 넓은 호텔에 울린다. 아들은 세발 자전거로 호텔 로비를 오가고, 엄마는 넓은 호텔 주방에서 요리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이 호텔에는 악령들이 살고 있다. 쌍둥이 딸을 도끼로 무참하게 살해한 아버지의 악령도 있고, 죽은 이들의 영혼도 떠나지 않고 이 호텔을 맴돌고 있다. 그 약령들이 아빠에게 찾아온다. 그들의 사주를 받아 도끼를 들고 죽이려고 덤벼든다.
스탠리 큐브릭은 거대한 악령의 소굴에 빠진 잭이 서서히 미쳐가는 과정을 섬뜩한 이미지들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도끼로 문짝을 내리찍으면서 아내에게 "여보, 나 집에 왔어(Honey! I'm Home)"라고 달콤하게 얘기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특히 보통 때도 범상하지 않은 잭 니콜슨이기에 더욱 리얼하다.
문자의 공포라고 할까. 아들 데니가 문에 쓰는 글자는 급한 클로즈업과 째지는 듯한 음향효과로 인해 공포의 극치를 보여준다. 'REDRUM'이라 써놓고는 계속 '레드럼! 레드럼!'이라고 고함친다. 아들을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엄마는 거울에 반전된 글자를 본다. 그 글자는 살인이란 뜻의 'MURDER'이다.
그리고 열심히 소설을 쓰는 남편의 수백 장이나 되는 원고에는 단 한 문장만 빼곡히 들어차 있다.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이란 속담이다. '공부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뜻이다. 그동안 열심히 일한 잭이 결국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는 사실을 알고 아내는 경악한다.
화가 이영철은 "잭의 사이코적인 기질이 가장 강렬하게 묻어나는 것이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작품 속에 텍스트를 넣었다.
'샤이닝'의 압권은 마지막 미로 부분이다. 아들 대니를 죽이기 위해 정원의 미로에 들어간 잭이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미로를 헤매다 도끼와 광기, 마지막 호흡까지 내려놓는다. 도끼를 들고 홀로 걸어가는 잭의 뒷모습을 핏빛으로 채색했다. 폭포처럼 복도에 쏟아지던 피의 범람이다.
시인 문인수도 '미로'에 주목하고 있다. 벼랑으로 치닫는 남자의 광기가 길 한 가닥으로 난 미로에서 길게 빨려 들어가는 이미지를 그려냈다.
'산악' '자물통' 등의 시어를 통해 참으로 단단하게 고립된 악령의 거대한 아가리를 공포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 속의 악령들은 흔히 공포영화에 나오는 처절한(?) 귀신의 모습이 아니다. 산발하지도 않았고, 피를 철철 흘리지도 않는다. 깨끗한 양복에 고상한 말을 하는 젠틀맨이고 우아한 여인이다. 고급스런 호텔만큼 귀족적이다.
스탠리 큐브릭이 주목한 것이 이것이다. 그는 흠잡을 데 없이 안전하다는 것 속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 그것이 가장 끔찍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것은 인디언을 학살해 만든 미국이라는 나라의 안전틀을 은유한 것이다. 또 미로에 갇혀 허덕대는 현대인의 삶도 투영된다.
탁월한 공포 이미지와 고급스러운 은유까지 대구의 폭염을 식히기에 이만한 영화가 없어 보인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샤이닝(The Shining, 1980)
감독:스탠리 큐브릭
출연:잭 니콜슨, 셜리 듀발, 대니 로이드
러닝타임:146분
줄거리:잭 토랜스(잭 니콜슨)는 겨울 동안 폐쇄되는 콜로라도 산맥에 있는 오버룩 호텔의 임시 관리인으로 취직한다. 그러나 폭설로 고립되자 아내(셜리 듀발)와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잭의 아들 대니는 호텔에 유령이 있고, 유령들이 천천히 아버지를 미치게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잭은 아내와 두 딸을 죽인 예전 관리인 그레이디의 유령을 만나면서 악령에 휘말려 호텔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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