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TV 10년, 라디오 떠난지도 4년…방송인 황인용씨

그는 솔직했다. 첫인사로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했던 얘기인데 인터뷰할 것이 뭐 있나?"라고 반문한 것부터, 인터뷰 막바지에 "내 인생을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인간"이라고 자신을 간단하게 정의한 것도 그랬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꾸미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는 자신의 공간과 닮아 있었다. 장식 하나 없는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지은 '카메라타'(Camerata: 이탈리아어로 '작은 방'을 뜻한다. 크게는 '동지들'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기둥 하나 없이 탁 트인 그곳은 3층까지 뚫린 창 사이로 밝은 햇빛이 머물며 공간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방송인 황인용(68). 어느 순간 TV에서 그 얼굴을 볼 수 없고, 라디오에선 그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헤이리 마을의 음악감상실 카메라타에 가면 정겨운 그 얼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 파주, 그곳에서 그는 순수 아날로그 감성으로 LP음반을 틀어주고 있다. 지난 22일 헤이리 예술마을에 위치한 카메라타로 그를 찾아갔다. 인터뷰 내내 입구 반대쪽 벽면의 3분의 1 이상을 채운 대형 스피커 4대에서 흘러나오는 고전음악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황씨는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굵은 톤의 나긋한 목소리도 여전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부정하는 뜻으로 손사래 치는 일이 많았다. 답할 땐 첫 문장을 길게 빼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은퇴 아닌 은퇴

-요즘 생활은 어떻습니까?

"요즘 국선도를 시작했어요. 한달가량 됐나? 매주 화·목·토 오전 7시반에 동네 분들, 동호인들과 국선도를 해요. 아니면 풀을 뽑는다거나 주변 정리를 해요. 여기에 잡풀이 많이 나거든요. 건물 안은 우리 스태프들이 하고, 바깥쪽은 제 담당입니다. 국선도 모임이 없는 날은 여기서 10분쯤 떨어진 연습장에서 골프 연습도 해요. 그리고 근처 헬스클럽에서 운동도 하고요. 오전은 거의 운동하는데 보내죠. 그리고 보통 오전 11시 정도에는 이곳에 와서 거의 저 혼자 음악을 들어요. 점심 식사 전까지 1시간 정도. 제가 음악을 많이 들어야 손님들한테 들려줄 수 있으니까. 또 제가 음악 듣기를 워낙 좋아하니까요. 음반이 1만5천장쯤 있는 것 같은데, 저 중에서 듣지 못한 게 거의 다예요. 저거 죽기 전에 다 들어야 억울하지 않죠. 돈 주고 산 건데…. 하하."

-단순하고 무료한 삶 아닌가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때로는 무료합니다. 저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강제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제라는 것은 직장생활을 한다거나 방송을 규칙적으로 한다거나 말이죠. 더군다나 전 일생을 거의 제가 컨트롤한 게 아니고, 거의 방송시간이 저를 타의적으로 컨트롤하는 생활을 했던 것 아닙니까? 그러다가 강제하는 시간이 없어졌을 때 그 시간을 아주 적절하게 요리하고, 정신적으로 별 탈 없이 생활한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이 음악감상실이 없었으면 아마 거의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요즘엔 이게 나를 어느 정도 강제하는 거죠. 그러나 이거는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그만이고, 제가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어떤 때에는 무료한 정도가 아니고 방송을 안 하니까 패닉(공황) 상태까지는 아니지만 견디기 힘들 때도 있어요. 아직도 그래요, 아직도. 방송 벌써 그만둔 지가 TV는 벌써 10년이 넘었고, 라디오도 4년이 넘었는데."

-방송을 그만둔 건 자의에 의해서였나요?

"자의고 타의고 그런 것이 개입될 여지가 없이 자연스럽게 됐어요. 제가 '그만둬야겠다' 하는 어떤 의지가 있어서 된 게 아니고, 운명적으로 '그런 정도에서 방송을 끝내라'하는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제가 일부러 방송을 안 하려고 '이젠 그만두겠다'라고 선언한 적도 없고요. 그러나 제가 방송 프로그램을 맡으려고 애를 쓰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방송국에 가서 '이런 방향의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한 적도 없고. 사실 한국방송계가 예전엔 프로그램을 하나 맡으면 아무리 못 가도 3, 4년 심지어 15년 하는 것도 있으니까, 방송 프로그램을 맡으려고 애를 쓰는 준비가 안 돼 있었죠. 그런데 섭외가 안 들어오니까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된 거죠."

-많이 아쉬웠겠네요?

"엄청나게 아쉽죠. 방송은 특히 매회 할 적마다 '오늘 방송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MC는 없을 겁니다. 방송 끝날 때마다 항상 '미진하다'거나 '부족하다' 생각해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매일 두 시간씩 하고 나면 '방송이 이것밖에 안 되나'하는 것이 20년 넘게 쌓였을 것 아니에요? 그러니 얼마나 아쉽겠어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준 분들에게 고별하고 감사하는 자리 없이, 매듭이 없이 슬며시 그만둔 거잖아요. 대학교수는 은퇴할 때 은퇴 논문집을 낸다거나 은퇴식을 호텔에서 열기도 하는데, 저라고 그런 욕심이 왜 없었겠어요? 여기 오시는 분들도 '요즘 방송하는 겁니까, 안 하는 겁니까' 물어요."

◆TBC 통폐합과 눈물의 고별방송

(1980년 11월 30일 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정책에 의해 TBC(동양방송)는 KBS에 통합돼 문을 닫았다. 이와 함께 TBC의 간판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도 청취자와 마지막 인사를 해야 했다. 시그널 음악인 폴 모리아의 '시바의 여왕(La Reine De Saba)'이 흐르자 DJ 황인용은 "기억하시죠? 이 시그널. 오래 기억해 주세요"라며 끝 방송임을 알렸다. 목소리 가득 눈물기를 머금은 황씨는 자정이 다가오고 애청자들에게 고별사를 고하면서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날의 방송은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마지막 방송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어요. 처음으로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제가 성격이 진취적이지 않아서 한 번 직장은 영원한 줄 알았지, 방송국이 사라진다고는 생각도 못했죠. 그런 고정관념 속에 살다가 방송국이 없어지니까 '역사라는 게 개인이 아무리 거부하고자 해도 사회 전반적인 흐름에 도저히 역행할 수는 없는 거구나'하는 엄숙한 운명을 느낀 거죠. (그는 이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은 휩쓸려 가는구나' '개인은 무력하구나'하는 것도 절실하게 느꼈어요. (황씨가 말을 하는 동안 스피커에서 엄숙한 합창 소리가 톤을 높였다. 묘한 우연!)

-그 이후 삶에 대한 시각에 변화가 있었나요?

"아니, 그렇진 않았어요. 제가 그렇게 심각한 사람이 아니에요. 시대에 적응하며 살려고 하지. 그러니깐 1970년대의 격동기를 무난하게 보냈었지? 하하하. 무난하게 보냈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침묵하고 보냈다는 것 아니겠어요? 적응하면서."

-방송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그는 경희대 법학과 출신이다.)

"우연히 시험을 보게 됐어요. 방송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대학 다닐 때 방송을 듣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옛날에는 라디오 방송도 변변히 없었지요. 학교 다닐 때 대학방송국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어요. KBS가 주최한 대학방송 경연대회에 경희대 대학방송국이 응시를 했는데 거기에 성우로 참여했어요. 아나운서 공부를 따로 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TBC에서 성우를 뽑는다는 것을 친구가 알려줘서 시험을 쳤어요. 그렇게 방송을 시작하게 됐어요. 대학 때의 조그만 경험이 제 운명을 결정지은 거죠."

◆작지만 큰 공간 카메라타

황씨는 카메라타 건립도 계획을 확실히 세워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방송을 오래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할 일도 없을 때 음악감상실 같은 것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헤이리 문화예술마을 조성에도 그가 주축은 아니었다. 뒤늦게 헤이리 문화예술마을 조성 사업을 알게 됐고 고향인지라 동참했다. 그는 자신이 회원이 된 것이 '139번째'라고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러나 음악감상실로서의 카메라타의 수준은 꽤 높다. 사람을 압도하는 4개의 대형 스피커들은 이름난 빈티지 명품이다. 1930년대 웨스턴 일렉트릭사의 제품과 1940년대 만들어진 독일의 클랑필름 스피커다. 클랑필름 스피커는 히틀러가 군중을 선동할 때 썼던 것과 같은 제품이다. 스피커 4개 모두 외국의 극장에서 쓰던 것을 황씨가 10년 걸려 마련한 것들이다. 3층까지 뚫어 놓은 공간도 스피커에서 나온 음을 자연스럽게 울리는 역할을 한다.

카메라타를 개업하는데 든 자금은 그가 프리랜서로 번 돈을 모아 충당했다. 그는 "월급 생활을 끝까지 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70년대 말까지는 집에 라디오도 하나 없을 만큼 가난했다는 부연 설명과 함께. 1980년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음반도, 기기도 사 모으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살고 있는 그이지만 "2, 3시간 정도 들어야 아날로그랑 디지털 소리의 차이를 알겠지만 30분 정도 듣는다면 디지털 소리가 산뜻하고 좋다"고 시원스럽게 웃어넘겼다. 그러면서 그는 "음악이란 것은 감성이나 관념의 문제"라고 했다.

은퇴했지만 그의 유명세는 여전하다. 사진 촬영을 하는 중에도 한 중년이 "황 선생님 보러 일부러 왔다"고 했다. 황씨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서울이다. LA에서 사는 분이 오셔서 찾아왔다"고 답했다. 디지털 기술로 원음에 가까운 음악을 듣는 시대에 클래식 음악을 LP판으로 듣는 카메라타에는 방송인 황인용에 대한 추억과 함께 그렇게 시간이 멈춰 있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황인용은?=1940년 1월 1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경희대를 졸업하고 1967년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TBC) 3기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라디오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여러 방송을 진행했다. 1980년 프리랜서로 전환, 다양한 방송국에서 TV와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04년 9월 경기도 파주헤이리에 토털미술관 고전음악감상실 '카메라타(Camerata)'를 개업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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