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유명하게 한 것은 '악바리' 기질이었다. 1982년 15세의 나이에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 입학한 것도, 1985년 로잔 국제발레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을 하는 등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떠오른 것도 다 그 근성 때문이다. 하루에 15시간 이상 연습으로 토슈즈를 네 켤레(보통 2주일치)나 써버려 물품 담당자가 "아껴 써달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왼쪽 정강이의 통증을 참아가며 수년간 연습과 공연을 거듭하다 결국 의사로부터 '무용 잠정 중단'이라는 조치로 1년 넘게 쉰 다음에도 꿋꿋이 재기했다. 그렇게 그녀는 세계 발레계에서 우뚝 솟았다.
'월드 발레리나' 강수진(41)씨를 지난 19일 오전 서울 장충동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이날 서울에는 태풍의 영향으로 시원스레 비가 내렸다. 강씨는 20일 안산에서 시작해 다음달 1일 의정부 등 전국 7개 지역에서 펼치는 순회 공연 '강수진과 친구들' 공연차 지난 17일 귀국했다. 시차로 인해 잠도 제대로 못 잤다는 그녀였지만 인터뷰 내내 피곤한 기색 하나 없었다. 세계를 누비고 다니면서 "버릇이 됐다"고 했다. 20여년 타국 생활 탓인지 그녀의 답변은 길었고 완결된 문장이 별로 없었다. 간간이 영어 단어를 쓰기도 했다. 그래도 자신의 생각을 거의 막힘 없이, 손짓을 해 가며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한국무용 전공에서 월드 발레리나로
-발레를 시작한 계기는 뭔가요?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어디서 발레 얘기를 듣고 왔나 봐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발레할 사람 손 들라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하시더군요. 어느 날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발레 하고 싶은 사람 없느냐고 하기에 손을 들었죠. 그때는 한국무용을 하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그냥 제 골격을 만져봤고…. 그냥 그렇게 시작했어요."(생각보단 밋밋한 답변이다. 토슈즈를 신고 발을 내딛는 순간 운명적으로 바람이 든 것도 아니었다. 인터뷰 중에 그녀의 남편 툰치 소크만씨가 왔다. 청바지에 티셔츠 입고 모자를 쓴 수수한 차림의 앳된 모습. 웃음이 기억에 남는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시작하자마자 발레에 빠졌다던데요?
"하자마자는 아니고…. 아무튼 1년간은 아니었죠. 왜냐하면 제가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뼈가 굉장히 굳어 있었어요. 다른 아이들이 발레를 6년간 했다면 저는 한국무용 테크닉을 익혔거든요. 뼈 구조도 완전히 안으로 굽게 배웠고. 그런데 발레는 뼈를 바깥으로 돌려야 하니까 처음에는 힘들어서 게을렀어요.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여자 선생님의 발레 모습이 너무 예쁘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하다가 그때부터 빠져들었죠. 한 번 끌리기 시작하니까 빠져나갈 수 없더라고요."
◆낯선 타국살이 그녀를 키운 8할의 바람
-하루에 15시간 연습을 했다는데, 그런 성향이 어릴 적부터 있었나요?(그녀는 불혹을 넘긴 요즘도 끊임없이 연습을 한다. 아침에 일어난 뒤 집에서 2시간, 극장에 출근해 오후 6시 30분까지 쉼없이 몸을 놀린다. 공연을 하게 되면 오후 11시까지 춤을 추는 생활이다. 견디기 힘든 단순함의 반복일 수 있는데도 그녀는 '매일 새로운 날'이라고 주장한다.)
"예. 학교 다닐 때부터. 제가 특히 공부하고 발레를 같이 했잖아요? 제 자신이 90점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발레도 같이 하려니 잠잘 시간이 없더라고요. 새벽 4시에 당시 남산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학교에서는 오후 5시까지 공부했어요. 학교 수업 마친 뒤엔 학교에 남아서 밤 10시까지 연습했어요. 집에 와서 토슈즈 신고 연습하다가 저녁에 공부를 했어요. 그때 그렇게 한 게 많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어렸을 때 그렇게 교육을 안 받았으면 유럽에 혼자 가서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아요."(일화는 더 있다. 발레학교 기숙사 생활 시절에는 밤 9시가 되면 모두 불을 끄고 잠을 자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경비들의 순찰이 끝나는 밤 11시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기숙사 위층의 스튜디오로 가서 모나코 야경이 펼쳐지는 곳에서 홀로 달빛을 받으며 새벽까지 땀 흘리며 연습했다.)
-해외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라고 조언했다고 들었어요. 본인은 어떻게 적응했나요?
"적응 못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돌아오고 싶었어요. 언어가 안 통하니까 굉장히 외롭고, 음식도 너무 안 맞았어요. 먹지 못 하니까 건강도 굉장히 안 좋았고요. 익숙해지는 데 2년 걸리더라고요."
-어떻게 극복했나요?
"떠난다는 결정을 하고 짐까지 쌌었어요. 교장 선생님(그녀를 발탁한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의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댁에 가서 말도 안 통하는데 손짓 발짓하면서 '한국 간다'고 그러면서 막 울었죠. 그런데 교장 선생님께서 '네가 재능이 있으니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시더군요. 교장 선생님께서 굉장히 무서운 분이셨는데, 그런 분이 마음을 여니깐 사람이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에 열심히 했어요."
◆세계 어디서나 무대 위 느낌은 같아
-콩쿠르 우승 후 여러 단체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을 텐데, 왜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을 택했나요?
"어린 나이였던 저는 발레단이 어디가 좋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너한테는 이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이 가장 적합하고 좋은 발레단이다. 가서 오디션 해보라'고. 그래서 가서 바로 붙었어요. 저희 발레단이 굉장히 인간적인, 그런 게 있어요. 약간씩 가족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편해요. 그리고 클래식, 네오클래식, 모던 등 모든 작품을 할 수 있는 곳이에요. 그게 저한테는 제일 중요했고. 그리고 모든 안무가들이 다 와서 같이 작업을 할 수 있고요."
-한국에서의 첫 공연은 언제였나요?
"1992년도에 조그만 갈라 공연을 했어요. 발레단하고 전막 공연으로는 1994년도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이었어요. 오는 11월에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해요. 제가 첫번째로 주역을 맡은 작품이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죠."
-무대에 선 기분은 어때요?
"자유가 있어요. 어느 작품의 어느 역을 할 때는 자기가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거잖아요. 보통 삶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힘들죠.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는, 항상 그렇게 억압이 된 상태. 발레란 건 고도의 예술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건 이렇게 해야 하고 하는 프레임(틀)이 있죠. 하지만, 그 프레임 안에서 자기만의 것을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름다운 거죠, 예술이."
◆공연 뒤에는 언제나 아쉬움 남아
-기억에 남는 공연이나 사람이 있나요?
"뉴욕에 갔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거기는 평론가들이 '때리면' 공연이 죽고 '올리면' 완전 스타가 되잖아요? 그래서 저희 발레단 감독 이하 모두가 긴장했죠. '오네긴'의 타티아나 역으로 첫 공연을 했는데, 뉴욕타임스 등에서 평가가 좋았어요. 그 평론 때문이 아니라, 공연 자체가 저한텐 만족스러웠어요. 제가 만족하는 경우가 굉장히 드문데…. 파리에서 '말괄량이 길들이기'로 공연할 때도 만족스러웠어요."
-'오네긴'의 주인공 타티아나가 본인과 닮았다고 했는데요.
"이 역의 매력은 1막에서는 어린 처녀가 3막에서는 성숙해 결혼하는 과정을 공연한다는 거예요. 한 여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거죠. 어떤 작품들은 주인공의 나이대가 1막에서 3막까지 같지만, 타티아나 같은 경우는 그 변화의 프로세스가 굉장히 흥미롭거든요. 1막과 3막이 완전히 다른, 성숙한 여인으로 되는 그 순간이 굉장히 드라마틱하잖아요.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놔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예술적 영감은 어떻게 얻나요?
"항상 어떤 역을 맡았을 때는 스텝 연습 전에 그 작품에 관한 책을 먼저 봐요. 저만의 것을 찾아내고 저만의 역으로 만드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저는 다른 사람처럼,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어요. 어렸을 적부터 흉내 내는 걸 너무 싫어했거든요. 누가 똑같은 것을 입으면 그 옷은 안 입었어요.(웃음) 개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색깔이 없으니까. (그녀의 목소리 톤이 살짝 강해졌다) 많은 역을 해오면서 '내 속에 많은 색깔이 있구나'라는 것을 느껴요. '내가 모르고 있는 나의 것'이 나오니까요."
그녀는 발레리나로서는 '환갑'일 수 있는 불혹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주역으로 뛰고 있다. 그녀의 말대로 연습하고, 밥 먹고, 잠자고, 다시 연습하는 무척 단조로운 삶을 견뎌낸 대가다. 그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는 말이다. "과거와 미래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오늘 열심히 연습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하죠. 어제보다 더 좋은 공연을 할 수 있는 데 전력하는 거죠." 프로 정신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래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가정하는 것은 그녀에게 시간 낭비에 불과한지 몰랐다.
연습장으로 가는 차를 기다리는 그녀의 발을 유심히 쳐다봤다. 단아한 구두 위로 발가락 뼈마디가 툭 하니 튀어 나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못났지만 가장 아름다운 발'이다. 그녀가 발레 하나로 전 세계를 누빌 수 있게 한 피나는 연습의 결과물이다. 오직 발레만을 생각하는 그녀는 무대 위 작은 몸짓 하나만으로도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해준다. 세계 발레계에 우뚝 솟은 그녀가 친구들과 함께 펼치는 아름다운 몸의 향연은 26일 오후 7시 대구 수성아트피아 공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강수진은?=1967년 서울생. 1979년 선화예중에 입학해 한국무용을 전공하다 발레를 시작했다. 1982년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로 유학했다. 1985년 동양인 최초로 로잔 국제발레 콩쿠르에서 1위를 했다.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연소(19세)로 입단해 20년 넘게 활동하고 있다. 1993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첫 주인공을 맡았다. 1999년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ce)' 최고여성무용상을 받았으나 정강이 부상으로 1년 넘게 쉬웠다. 재개에 성공한 그녀는 2002년에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종신회원이 됐다. 같은해 발레단 동료인 툰치 소크만(48)과 결혼했다. 지난해 독일 뷔템부르크 주 정부의 '궁정무용수(Kammertanzerin)'로 공인됐다. 고통을 인내하는 훈련으로 뒤틀린 발가락 사진으로 더욱 많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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