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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네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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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성폭력 피해를 입은 자매가 있었다. 아버지는 자매를 번갈아가면서 성폭력을 하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했고, 힘들어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더니 너희들도 잘못이 있다면서 아버지 근처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만 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언니의 경찰 조사는 끝이 났고 동생이 조사받고 있었다. 언니를 상담하고 있는데 동생이 조사과정에서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지 않아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다며 휴게실에 왔다. 아이는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했다.

성폭력 피해는 단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말함으로써 피해 당시의 고통과 아픔이 떠오르고 아버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고, 도움을 요청한 엄마도 아이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짧은 상담 동안 아이의 마음을 달래고 안심시켰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불안해하고 있는 아이를 가만히 안아줬다.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진실을 말해야 네가 보호를 받고 잘못한 아버지가 다시는 너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게 된다고, 힘들지만 이야기를 해보자고 아이를 달랬다. 안심을 한 아이는 그제서야 말하겠다고 했다.

거의 오후 10시가 다 되어서야 조사가 끝이 났다. 아이들을 안전한 공간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쉼터에 가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을 쉼터에 데려다 주고 자정이 다 돼서야 집으로 왔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아이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할 때 피해의 고통과 아픔이 떠오르듯 나 역시 그 아이들이 겪었을 두려움과 공포와 아픔들이 느껴졌다. 이후 아이들이 겪어야 할 지난한 고통들이 떠올라 잠을 설쳤다. 성폭력 사건을 잘 처리해야 하는 것, 아이들의 치유과정에 함께하는 것, 근친 성폭력이기 때문에 집을 떠나 아이들을 안전한 환경에 살게 하는 것 등을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가정은 안식처이고 베이스 캠프라고 하는데 왜 가정에서 가정폭력과 성폭력 등 무수한 폭력들이 난무하는 것일까? 가정이 안전한 곳이 아니고 폭력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아이들은 어디에 가야 한단 말인가? 성폭력의 후유증 중에서도 근친 성폭력의 후유증이 제일 심각하고 그 상처가 크다. 그 어린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 그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

성폭력 사건을 접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우리가 하고 있는 성폭력 추방운동의 결실이 과연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좌절감에 마음이 무겁다. 미안함과 좌절감 속에서도 다시 한번 더 힘을 내어 우리의 아이들이 성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작은 한걸음을 내디뎌본다. 성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 길에 모두 함께하길 간절히 바란다.

조윤숙 (사)대구여성의전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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