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낡은 것에 대한 그리움

동물의 왕국을 보다 보면 동물 중에 가장 겁 많고 유순한 것이 말이었다.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사나운 뿔도 이빨도 포효도 없이 천적 앞에선 무조건 도망쳐야 했던, 그렇다 보니 도망치기 좋은 빠른 다리 말고는 아무런 방어 능력도 없던 외로운 동물이 바로 말이었다. 그렇더라도 황혼을 배경으로 사바나 초원을 무리지어 달리던 그 아름다운 얼룩무늬는 얼마나 관능적이고 고혹적이던가?

내 그리운 애마 '마르샤'는 순백의 갈기가 눈부시게 아름답던 백마였다.

그 여성스런 이름에 걸맞게 조용하고 부드러운 무소음 주행을 자랑하며, 10년도 넘게 나를 태우고 걷고 달리며 오랫동안 나와 함께했던 철마였다. 우아한 곡선미와 편안하고 안락한 승차감도 좋았지만, 어쩌다 안개 속을 비추던 그 은은한 안개등은 먼 바다의 등대불빛처럼 멀리서 더 아름다웠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단종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했던 불운한 철마이기도 했다.

순진한 나의 애마는 이따금 거대한 덤프트레일러가 매머드처럼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면 놀라 그 자리에 덜컹 멈추어 서기도 했고, 폭탄 같은 가스통을 싣고 '접근금지' '화기엄금'의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종횡무진 내닫던 용달트럭을 볼 때면 멀리서 서늘해진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백주 대낮 도심을 무법천지로 만들며 '차선무시' '신호무시'를 일삼던 시내버스나 늦은 밤 갈지자스텝으로 도로 한복판을 누비던 음주차량을 보면 얼른 주행선을 바꿔 멀찌감치 피해버리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애마도 한번쯤은 이 풍진 세상을 질풍노도처럼 달리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천하를 꿈꾸는 웅혼한 주인을 태우고 광풍처럼 치닫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다면 그 역시 관우의 적토마나 항우의 오추마처럼 기꺼이 제 주인과 목숨을 함께해 주었을까?

그런데 음풍농월하는 시인을 만나 때로는 수양버들 아래 당나귀처럼 때로는 세한도 아래 조랑말처럼 하염없이 제 주인을 기다리는 나날이 더 많았으니 그로서는 덧없는 한생이었을까?

사람들은 자주, 세상이 기계화되어 삭막하고 비정하다 불평하지만 정작 기계만큼 정직하고 일편단심인 것도 없다. 한여름 깊은 그늘을 찾지 못한 나에게 선풍기나무는 어김없이 시원한 바람을 불어주었고, 한겨울 온풍기는 언제라도 스위치만 넣으면 불꽃나무처럼 주위를 활활 뜨겁게 해주었다. 또한 사계절 싱싱 냉장고는 내가 원할 때마다 그 투명하고 아름다운 얼음열매를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이렇듯 나의 애마는 오매불망 내 곁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친구처럼, 애인처럼 내 곁을 머물다 떠났다. 내 열정이 식은 만큼 타이어 바람이 빠지고, 내 시야가 흐려진 만큼 와이퍼도 닳고 녹슬었으며, 내 주름이 늘어나듯 온몸이 긁히고 상처투성이로 늙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내 가족이 아팠을 땐 어느 맹수보다 용감무쌍하게 달려주었고, 뜻밖의 폭우나 폭설 또는 불빛 하나 없는 낯선 길 위를 헤맬 땐 충직한 개처럼 나를 안심시켜주기도 했다.

그런 그를 내 어찌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라 말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함께하며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맥박과 심장의 박동까지 느껴왔던 그를 내 어찌 한낱 고철덩어리라 부를 수 있을까? 누가 내게 그처럼 맹목적이고 순종적일 수 있으리. 나의 마샬, 그리운 나의 철마여!

박이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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