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재 & 문화] 김천 갈항사터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구역에는 국보 제99호로 지정된 갈항사 삼층석탑 두 기가 나란히 서 있다. 명색이 국보라고는 하는데, 가만히 보아하니 이것들은 모두 상륜부를 잃어버린 상태인데다 아쉽게도 '서탑'으로 부르는 한쪽 석탑은 옥개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처량한 몰골이다.

하지만 이 석탑의 남다른 가치는 무엇보다도 '동탑'의 기단부에 남겨진 쉰 네 글자의 명문에 있다. 여기에는 "두 탑은 천보 14년에 남자매 3인의 업으로 세워졌고, 오라비는 영묘사 언적법사이시며, 손위누이는 조문황태후 군니이시며, 손아래누이는 경신태왕의 니이시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군니'는 '언니'의 뜻으로, '니'는 '어머니'의 뜻으로 각각 풀이된다고 이른다. 그리고 '천보 14년'은 신라 경덕왕 17년이므로 이 석탑은 곧 서기 758년에 건립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로써 갈항사 석탑은 다른 석탑들의 제작연대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원래 이 석탑들은 경북 김천시 남면 오봉리에 있는 갈항사터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석탑도괴사건이 벌어지자 그것을 핑계로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총독부 박물관이 있는 경복궁으로 옮겨진 내력을 지녔다. 특히 석탑을 해체할 때 두 탑의 기단부 아래에서 모두 사리구가 출토된 것도 주목된다.

흔히 석탑의 경우에는 탑신부에 사리장치가 안치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처럼 탑의 기단부 아래에서 사리구가 나온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 당시에 출토된 사리구들은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진열, 전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일이 아니더라도 갈항사는 '삼국유사'에도 등장하고 있으므로 그 유래는 확실한 편이다. 여기에는 "승전이라는 스님이 이곳을 개창하여 돌해골을 관속으로 삼아 화엄경을 강의하였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이 절터의 보존상태는 어떠할까?

금오산 자락의 서편에 해당하는 갈항사터에는 석탑의 원위치를 나타내는 표석이 쓸쓸히 남아 있을 뿐 주위가 온통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서 거의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곳에는 보물 제245호로 지정된 오봉동석조석가여래좌상이 안치된 보호각 하나가 절터의 가장자리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정작 갈항사터 자체가 지정문화재의 대상에서 비껴나 있는 것은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사찰건립의 유래가 확실하고 이곳에서 출토된 석탑과 석불이 국보와 보물이 지정되어 있을 정도라면 갈항사터가 진작에 국가사적지로 지정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지방기념물로라도 포함되었어야 마땅할텐데, 그러한 시도조차 있었다는 소식은 아직 들어보질 못했다.

더구나 절터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조사는 차치하고라도 주변 일대에 널려진 기와조각이라도 제대로 수습하여 놓았다는 소식도 미처 들어본 적이 없다.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석탑의 잔여부재는 물론이고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돌해골의 존재가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차제에 '오봉동석조석가여래좌상'이라고 보물 제245호의 지정명칭도 '갈항사석조석가여래좌상'으로 바로 잡아 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절터의 이름을 모른다면 모르되, 알고도 그냥 그러한 이름으로 둔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유형문화재만 잘 건사할 것이 아니라 문헌기록이 분명한 역사의 현장이자 그러한 유물의 출토지를 잘 보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점에서 김천 갈항사터를 서둘러 '국가사적지'에 준하는 지정문화재로 고시해줄 것을 거듭 문화재당국자에게 촉구하는 바이다.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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