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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노래 정체성 못 따져…소리꾼 장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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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래는 슥슥 그어낸 한국화같다. 빈틈도 많고, 단순하다. 막걸리 한사발에 젓가락 장단을 치며 부를 유행가도 그가 부르면 구슬픈 이별가가 된다. 너무 꽉 짜여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요즘 노래와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노래의 여백 사이로 듣는 이의 삶이 스며들어가면 비로소 그의 노래는 완전해진다.

소리꾼 장사익을 지난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길을 못 찾아 헤맨 기자를 위해 대문 앞에 나와 있었다. 기자를 보자 두 팔을 벌려 반가워한다. "전화로 하시지 뭣하러 이 멀리 오신데요." 그가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눙친다. "1965년부터 서울생활을 했는데요. 말투가 안 바뀌어. 접었어요. 접었어. 그냥 촌사람으로 살지."

너른 창 너머로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의 말마따나 '큰 새가 날아와 가슴에 안기는 듯'하다. 그는 달변이었고 말투에는 운율이 살아있었다. 줄곧 속삭이듯 말을 잇다 중요한 대목에는 힘을 주듯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두고 "첫 잔을 마시면 찌르르한 내린소주같은 음악"이라고 했다.

◆기생(妓生)이 기생(起生)이 됐다

-최근에 울어본 적이 있나요?

"잘 울지는 않는데 노래에 진하게 묻히다가 한두 번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어요. 요즘 죽음이나 부모님을 주제로 한 노래를 많이 하다 보니 그런 경험이 있어요. 울고 나면 아주 기분이 좋아요. 비오고 난 뒤에 세상이 개운해지듯이 아주 정화가 되죠. 굉장히 소중한 체험이고요."

-먼길을 돌아 늦게 노래를 시작했는데, 좀 더 일찍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없습니까?

"거꾸로예요. 오히려 늦게 시작한 걸 고맙고 소중하게 생각해요. 마흔다섯에 인생을 다시 출발한거죠. 내년에 환갑이지만 노래할 수 있다는 꿈을 꾸는 게 얼마나 재밌어요. 일찍 시작했으면 이런 노래를 못 했겠지. 늦은 나이니까 인생의 굽이굽이나 죽음같은 무거운 주제를 노래할 수 있는 거예요. 젊었으면 인기를 바랐겠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노래만 찾고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만 생각한단 말이지."

-노래와 동떨어져 지냈던 삶이 오히려 노래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요?

"집을 지으려면 터를 닦고, 설계를 하고 벽돌을 하나씩 쌓아가잖아요. 노래도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요,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오다보니 된 거지. 매일 산에 올라 웅변연습을 한 어린시절과 농악대를 하시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 15번이나 직장을 옮기며 인생의 질곡을 겪은 것들. 노래학원에 다니고 국악을 배웠던 것들이 하나하나 벽돌이 된 거예요. 내가 가수를 하겠다고 집착을 해서 된 게 아니었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이 자연스럽게 오게 된 거예요."

-전생을 믿으십니까?

"믿는 편이에요. 어머니가 생전에 점을 보러갔더니 제가 전생에 '기생'(妓生)'이라고 그랬대요. 꼭 맞혔지 뭐. 분위기를 즐겁게 북돋워주는 것 아녀. 그래서 내가 '기생(起生)'이라고 한문 이름을 지었어요. 생기를 북돋워주는 기생이다. 세상과 삶을 아름답게 어릿광대처럼 돋워주는 놈이라고 해요. 제 공연을 찾는 분들이 다 돈 없는 사람들이에요. 8만원 짜리 표를 사면서 8만번을 고민하는 분들이야. 그런 분들에게 기생처럼 힘을 줘야지."

◆정성과 진심을 다하면 통한다

-공연 관계자들은 장사익의 공연은 무조건 매진이라고 한답니다. 그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나도 잘 몰러. 내가 TV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홍보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데 가수 노릇을 한단 말이에요. 내가 진실하게 부르면 사람들에게 진실이 가는 거예요. 호수에 파문이 퍼지듯 입소문을 타고 퍼진 것 같아요. 또 저는 표를 예매하는 관객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요. 3천~4천 명 되는 사람들에게 직접 이름을 쓰고 봉투에 넣어서 보내요. 예전에는 편지까지 일일이 썼는데 지금은 너무 많아서 내용은 복사를 하고 관객 이름과 제 이름을 직접 써요. 한번 공연하려면 편지쓰는데 열흘씩 걸려요. 또 연말연시에 편지를 쓰고 1년에 서너 차례씩 편지를 보내요. 공연도 제가 주제를 잡고, 내용을 다 기획해요. CD에 넣을 글도 다 결정하고. 이런 정성과 마음이 관객에 전달되는 것 같아요. 내 인성과 진실과 감성을 팔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와요."

-노래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겁니까?

"1993년 태평소를 시작하고도 유행가는 곧잘 했어요. 사물놀이 뒤풀이는 내가 휩쓸었거든. 1년 반쯤 지나니까 시를 읽으면 노래가 툭툭 튀어나오는거야. '찔레꽃', '국밥집에서', '섬' 이런 노래들이 다 그렇게 나온 거예요. 어느날 '똥창이'(그는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그렇게 불렀다)가 정식으로 무대에 나가라고 해요. '야, 싫다. 나이가 몇살인데' 그랬는데 계속 '딱 한번만 해' 그래요. 그래서 1994년 11월 6일 정식으로 노래를 시작한 거예요. 그 이튿날 아침에 너무 행복한 거야. 몇십년을 돌아 길을 찾았구나. 인생이란 이런 거구나. 일찍 피는 꽃도 있지만 늦가을에 피는 국화도 있구나. 만약 내가 가수가 되겠다고 나섰으면 안됐을거야."

-벌써 음악을 시작한지 15년입니다. 그동안 낸 앨범이 6장인데 적은 편 아닌가요?

"음악적으로 부족하니까 그렇죠. 내가 1년에 하나씩 낸다고 해서 다 소화할 수도 없고 그렇게 창조적인 사람도 아니에요. (녹차를 따르며) 이렇게 잔이 비어 있어야 물을 붓고 잔을 채우지 가득 차 있으면 어떻게 부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에 좋은 노래 하나만 있으면 끝이지. 난 악보도 그릴 줄 몰라요. 그러니 여기까지 온 것도 너무 감사한 거죠. 평생의 한 곡이 이미 나왔을 수도 있고, 영원히 안 나올 수도 있지만 꿈은 갖고 살아요."

-악보를 못 그리면 작곡은 어떻게 합니까?

"음악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에요. 좋은 시가 있으면 감정을 넣고 고저장단과 운율을 살려서 수백번씩 읊조려요.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음악적 경험과 가락들이 노래가 돼요. 그걸 녹음을 하고 기술자에게 맡기면 5분이면 악보가 나와요. 그래서 나는 작곡이라고 하지 않고 '엮음'이라고 해요. 악보를 못 그린다고 해서 자연과 인생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심정을 담을 수 없는 건 아니잖아. 오히려 더 신선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내 노래는 형식과 정체성이 없어요. 또 거의 편곡을 하지 않아요. 악보에 맞춰서 하면 재미가 없어."

◆죽음을 통해 삶을 노래하다

-'하늘가는 길', '꽃구경', '허허바다', '황혼길' 등 창작곡 30곡 중에 9곡이 죽음에 관한 곡입니다. 죽음에 천착하는 이유가 뭔가요?

"낮과 밤, 바다와 육지가 맞닿아 있잖아요.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우리는 죽음을 터부시하고 멀리하려고만 해요. 그래서 수년 전부터 한국적인 레퀴엠, 죽음에 관한 노래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어두울 때 밝음을 그리워하듯이, 추운 겨울에 여름을 생각하듯이 죽음을 알면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깨우치게 되지."

-해외 공연도 굉장히 많이 하는데 문화와 언어가 다른 그들과 어떻게 소통을 하는 겁니까?

"미국 공연을 하면 징을 먼저 둥둥 쳐요. 징소리가 공연장 전체를 채우거든. 그러면 처음 듣는 소리에 관객들이 놀라지. 그러다 해금, 북이 차례로 들어가고, 기타가 들어가고 내가 소리를 콱 지르면 깜짝 놀라요. 듣도 보도 못한 소리니까. 이게 한국 현대 대중음악의 소리구나. 내 음악은 빈 곳이 너무 많아. 그렇게 빈 자체가 내 맛이야. 대신 내 목소리는 한국의 산처럼 굴곡이 있고, 악센트가 있거든. 마늘이나 고추장처럼 맵고 톡톡 쏘게. 그러면서 소통이 되는 거예요. 내가 던지면 자기들이 알아서 빈 곳을 채우는 거지. 그게 교감과 소통이고."

-속마음을 잘 내비치지 않고 돌려서 말하기를 좋아하는 충청도의 기질이 노래에도 배어 있나요?

"충청도 사람들이 은유가 많아요. 의뭉스럽고. 화가 나도 '괜찮아유'하는데 그 안에는 '나쁜 놈'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얘기지. 내 노래도 은유가 많아요. 메시지를 던지는데 나중에 무릎을 치면서 '아, 그 얘기구나'하게 해요. 이번에 낸 '꽃구경'이라는 노래도 고려장에 빗댄 본질이 있어. 아무런 조건없이 감나무가 감을 주고, 사과나무가 사과를 주고 가듯이 부모도 자연과 똑같다는 걸 알아야돼요. 부모의 소중함과 자연의 소중함을 알라는거지. 은유가 있으니 여운이 오래가는겨."

◆난 후회같은 것은 하지않는다

-노래를 안했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아마 노숙자가 됐겠지."

-인생에는 3번의 기회가 있다고 하는데 본인은 언제였던 것 같습니까?

"노래를 찾았을 때가 가장 큰 기회였고, 세상에 태어난 것, 음악 인생에서 좋은 인연들을 만난 것이 세번째 기회였겠죠. 음악도 인연이에요.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 나를 천거해준 임동창을 만난 것도 큰 기회였고, 헤어지니 다른 좋은 친구들이 와서 도와주고. 내게는 다 큰 기회지."

-만약 3일 뒤에 죽는다면 뭘 하시겠어요?

"그냥 이렇게 사는 거죠. 세계적인 환경운동가가 죽을 때 '잘 놀았다. 안녕' 그러고 갔대요. 나도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를 하다가 죽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아. 천상병 시인이 정말 궁핍하게 살았지만 '하늘로 돌아갈 때 세상이 아름다웠다고 얘기하겠노라'고 했잖아. 내가 노래하는 것도 사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삶의 가치를 알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라는 의미예요."

-지금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게 있다면 뭘까요?

"없어요. 나는 제대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가 낳아주신 것, 아내를 만난 것, 헷갈리며 살았던 것들. 그 모든 것들이 노래를 하기 위한 빈 공간의 벽돌이라고 생각을 한단 말이요. 뱃속아이가 탯줄을 잡듯이 희망을 갖고 끊임없이 올바른 길을 가다보면 누구나 꽃을 피울 수 있다는거지. 모두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후회하고 폼 잡는게 무슨 상관이 있어?"

점심을 먹자는 그에게 '기차 시간이 바빠 어렵겠다'며 자리를 털었다. 그 때부터 그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버스정류장의 위치를 열심히 설명하더니 상에 내놓았던 떡을 싸라고 아내에게 소리친다. 정작 기차를 타야하는 사람은 느긋한데 배웅하는 사람 마음이 더 급한 모양이다. 부인 고완선씨가 말했다. "저 양반은 차 시간 얘기만 나오면 급해져요." 사양하는 기자의 손에 떡이 든 종이가방을 억지로 쥐어주며 그가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 내려가세유."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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