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명제 아래 주민이 직접 뽑은 단체장이 시·군·구의 행정을 책임진 지 만 13년 반이 지났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민선 1기 단체장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이 첫 임기를 마친 지 10년이 지났다. 스스로 단체장 시절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후임 단체장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해졌다. 대구지역 구청장·군수 7명과 경북지역 시장 8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행여 현직 단체장의 업무 수행에 지장을 줄 수 있다며 한결같이 직접적인 언급은 삼갔다. 지면 사정상 경북지역 초대 민선 군수 13명의 이야기는 담지 못했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말아야
전직 단체장들은 행정의 연속성이 없는 점을 가장 안타까워했다. 잘못된 흐름을 바로 잡는 것은 옳지만 전직 단체장의 그늘을 없애기 위해 앞의 계획과 정책을 모두 백지화시키는 후임들을 볼 때마다 분함과 배신감을 느낀다고 했다.
정동호(67) 전 안동시장은 굳이 안동의 사례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 뒤 "지자체가 추진하는 계획이 정부 예산에 반영돼 실제 집행되기까지는 계획 수립, 예산 준비, 용역, 타당성 조사, 설계 등 대개 3년이 걸린다"며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이 선임자들이 공들여 추진해 온 정책을 그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취소시키고, 그 바람에 공백이 커지는 점"이라고 말했다. 최희욱(73) 전 경산시장도 "후임 단체장이 선임자의 장기 계획을 묵살하고 자기 본위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 파행적 행정은 단지 후임자의 재임기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 발전을 적게는 10년 이상 늦춘다"고 했다.
단체장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시간과 힘을 낭비한 것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도 많았다. 오기환(76) 전 동구청장은 "구청장과 정치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일부 구청장들이 정치 눈치를 보면서 구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양시영(64) 전 달성군수는 "지역간 정당간 대립 때문에 인물은 둘째이고 어느 정당, 누구 라인이냐에 따라 당선이 결정되는 선거판이 됐다"며 "민선 2기부터는 정치바람이 불어 도저히 설 자리가 없었고, 무거운 절이 떠나는 것보다 가벼운 중이 떠난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박기환(60) 전 포항시장은 "여기서 비한나라당의 대표주자 격인데, 지역에서 소외되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며 "평소에는 아까운 사람이라고 하는 분들도 정작 투표를 하면 정당을 보고 찍는다"고 아쉬워했다. 이원식(71) 전 경주시장은 "한나라당 출신으로 당선됐다가 민주당으로 바꾸면서 결국 선거(3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며 "사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서울-대구-경주-부산으로 돼있던 고속철 노선을 김대중 정부에서 바꾸려고 하는 바람에 그걸 막기 위해 청와대까지 찾아가 항의하고, 당까지 바꾼 것인데 시민들은 그걸 몰라주더라"고 안타까웠던 심정을 토로했다.
◆보람과 아쉬움의 재임 시절
지난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박팔용(61) 전 김천시장은 많은 말을 아낀다며 이렇게 운을 뗐다. "1~3기 김천시장을 하면서 법정에만 35차례 섰고, 검찰이나 감사원 조사만 수백번 받았습니다. 심장 약한 사람은 놀라고 억울해서 죽었을 겁니다. 정적들로부터 받는 정치적 보복성 음해는 그만큼 무섭습니다. 그걸 바꿔보려고 지난 총선이 끝나고 이튿날 꽃다발을 들고 당선된 후보 사무실을 찾아가 진심으로 축하했습니다. 행여 당선자에게 짐이 될까봐 선거 직후 4개월여간 김천을 떠나있기도 했습니다. 선거에 공정하게 임하고, 또 졌으면 깨끗이 승복하고 진정으로 당선자가 제대로 시정·군정을 펴도록 도와주는 문화를 이룰 수 있기 바랍니다."
이의상(69) 전 서구청장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서구청이 앞장서 담장허물기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후 대구시가 확대 추진했다"며 "취임해보니 서구는 재정도 열악한데 조직이 너무 방만했고, 정부가 주도하기도 전에 인구 1만명 미만 동을 통·폐합해서 당시 21개 동을 18개로 줄였다"고 했다. 이재용(54) 전 남구청장은 "퇴폐업소가 밀집해 있던 양지로를 정비하면서 업자와 건물주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지역민과 여론의 도움으로 해낼 수 있었다"며 "미군기지 이전과 관련된 합의를 도출하는 토대를 마련한 것도 기뻤다"고 했다.
경북지역 민선 1기 시장들은 도시 인프라를 구축한 일이 보람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경주 보불로, 천군로, 강변도로를 확충하고 경주문화엑스포를 치르며 지원액 1천350억 원을 받아낸 이원식 전 경주시장은 '길 시장', '도로 시장'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뿌듯해 했다. 정동호 전 안동시장은 "유교문화관 개발계획이 지자체 계획 중 처음으로 국가정책으로 확정돼 2조1천300억원을 지원받았으며, 안동국제탈춤페스티발이 매년 전국 최우수축제로 선정되고 있는 점도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김근수(74) 전 상주시장은 "교통오지라는 상주에 고속도로 3곳이 뚫리고, 물류를 걱정하던 기업들이 찾고 있다"며 즐거워했다.
김학문(73) 전 문경시장은 외환위기 탓에 특히 문경의 발전이 많이 늦어지고 말았다고 술회했다. "지난 1994년에 문경 탄광지역이 완전히 문을 닫은 뒤 문경이 폐광진흥지역으로 지정됐습니다. 관련법에 따라 조세감면, 기반시설 지원 등 많은 혜택을 이주 기업에 줄 수 있었죠. 서울 한 호텔에서 전국 1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했는데 300여명이 참석해서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상당수 기업이 투자를 약속하고 사전 답사까지 다하고 돌아갔는데 그만 외환위기가 터졌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아쉽죠."
한 구청장은 "자리에 있을 때에 그렇게 자주 찾아오고 연락하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물러나니 아는 척도 안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처음에는 서운하고 괘씸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세월이 지나니 잊히고, 지금은 노인네 조언이라도 구한다며 가끔 찾아주는 사람들이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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