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9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탱고'

▲ 그림/전숙경
▲ 그림/전숙경
▲ 그림/전숙경
▲ 그림/전숙경

사내가 손을 내민다. 사내 뒤로 아프리카 대평원이 펼쳐지고 평원 너머 해가 지고 있다. 사내의 검고 굵은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반짝인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피부는 콜타르처럼 검다. 사내의 실룩거리는 엉덩이에서 신성한 야성이 느껴진다. 숫내가 나는 팔뚝과 검은 눈이 다가온다. 사내의 손바닥이 아랫배를 스치고, 다리 사이로 허벅지가 부딪친다. 맞잡은 손과 손, 대칭을 이루는 어깨, 엇갈린 다리, 맞닿을 듯 밀착된 가슴.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이 간지러워온다. 음악이 점점 빨라진다. 사내의 팔꿈치가 가슴을 스칠 때마다, 사내의 배가 내 배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숨이 막힌다. 쿵쿵쿵.

두 손을 허공에 버르적거리다 눈을 뜬다. 10분 동안의 짧은 졸음이었다.

비가 내린다. 비안개 너머로 붉은 십자가를 바라본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키 낮은 주택 사이로 십자가가 둘러서 있다. 도시는 거대한 공동묘지 같다. 빗소리 사이로 길고양이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비를 피해 들어온 고양이가 계단참에 웅크리고 앉아 내는 소리다. 갈색 털이 축축하게 젖은 채 계단에 세워놓은 자전거 뒤에 숨어 두려움이 서린 눈을 굴리고 있을 것이다. 왼손에 두 종류의 약을 들고 있다. 하나는 각성제고 다른 하나는 수면제다. 수면제를 먹고 악몽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각성제를 입 속에 털어 넣고, 각성제를 먹고 눈이 충혈되도록 깨어있다 지치면 다시 수면제를 먹는다. 창밖의 비를 보며 각성제 한 알을 삼킨다.

어둠 속에서 컴퓨터 CD가 혼자 돌고 있다. 4분의 2박자의 탱고다. 아코디언의 일종인 반도네온과 첼로 소리가 반복적으로 교차한다. 첼로가 우아하면서도 몽환적인 격정을 자아낸다면, 반도네온은 나른하고 퇴폐적인 긴장을 끌어낸다. 우물처럼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첼로 소리가 무겁게 지나가고 반도네온이 끈끈하게 달라붙는다. 같은 테마가 집요하게 반복되면서 두 악기가 서로를 압도한다. 그의 혀처럼 악기 소리가 몸에 엉겨 붙는다. 모니터 안에 흰 드레스를 입은 내가 검정 무도복의 그와 탱고를 추고 있다. 서로 밀고당기는 몸짓이 반도네온과 첼로만큼이나 치밀하다. 음악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두 사람의 몸은 하나가 된다. 쇄골이 드러난 어깨를 그의 왼쪽 어깨에 기댔다가 활처럼 젖힌다. 곧이어 왼쪽 다리가 그의 허벅지를 감싼다. 그의 눈이 나를 응시한다. 가장 멋진 춤은 연인과의 춤이지.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치켜 올라간 그의 입술이 떨린다.

그는 나의 탱고 선생이자 파트너였다. 웨딩 플래너 일을 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내 결혼 플랜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때였지만 행복한 사람을 보는 일은 즐거웠고, 새 출발하는 사람들을 보면 설렌다. 고객들과 한 달 남짓 붙어 다니며, 상담하고 일을 처리하다 보면 그들의 매니저가 아니라 친동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들이 허니문 떠나는 것을 수도 없이 배웅했고 차에 매달린 풍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생일과 결혼기념일 캘린더를 챙기고 안부전화를 했다. 그들은 가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무언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전봇대에 붙어있는 광고 포스터였다. 외국에서 돌아온 탱고 무용수의 귀국 공연 포스터였다. 빨간 구두만이 눈에 들어왔다. 공연장은 지하철로 두 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공연이 있던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떤 힘에 끌리듯 지하철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지친 몸으로 지하철을 탔다. 포스터의 주인공은 빨간 구두가 아니라 파트너인 남자였다. 어둠이 내리고 검은 커튼이 올라가자 무대 위에 동그란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4분의 2박자의 빠른 음악이 흘러나오자 가슴이 쿵쿵 북처럼 울렸다. 무대복을 입은 남자가 빨간 구두 무용수를 절도 있게 이끌었다. 눈을 떼지 못했다. 파도가 바위를 어르듯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단순한 동작인데도 개안을 한 것처럼 흥분에 싸였고 몸이 뜨거워졌다. 몸속에서 꿈틀꿈틀 무엇인가 살아나고 있었다. 이제껏 알고 있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운영하는 학원에 등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처럼 여겨졌다.

수강 첫날, 그는 창가에 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탱고를 육체로 쓰는 시라고 하지요. 춤이 별건가요. 언어를 대신해서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거지요. 자기 몸이 말하고 싶은 게 뭔지 귀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다들 마음이 몸을 움직인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몸이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탱고에 대한 자부심만은 알 수 있었다. 짙은 눈썹과 구레나룻이 조금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주었다. 웃을 때마다 구레나룻이 올라가 오만하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는 그걸 즐기는 듯했다.

고개는 항상 직각, 턱은 살짝 치켜들고 당긴다는 느낌이 들게. 어, 거기, 방금 한숨 쉰 여자분, 동작이 기억 안 난다고 그렇게 바보처럼 서있을 건가요? 탱고에서는 실수 같은 거 없습니다. 모든 동작이 춤이 되니까 겁먹지 말고, 배에 힘주는 것만 잊지 않으면 돼요. 미운오리처럼 번번이 지적받았지만 연배가 비슷해서인지 수강생들에게 새로운 동작을 설명하고 시범을 보일 때마다 그의 고정 파트너가 되었다. 어느 순간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온 그의 손이 의식되었다. 따스하고 힘이 들어간 손이 허리를 돌려세우고, 배 위를 지나 등 뒤에서 리드할 때 숨이 멈춰졌다. 탱고는 둘이 하나 되는 가장 매력적인 방법 중의 하나였다.

너한테 고소한 냄새 나. 비린내 없이 잘 굽힌 고등어 냄새나 바삭하게 굽힌 식빵 냄새 같은 것 말이야. 한 존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온도가 있다면 넌 그 적정 온도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향기로운 냄새를 가지고 있어. 그는 말했다. 너한테서도 비슷한 냄새가 나. 어릴 적 나는 다림질하는 어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 고소하게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곤 했다. 어머니가 분무기를 칙칙 뿌리면 분사되는 물안개 사이로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갈 것 같았다. 다리미가 옷 위를 지날 때마다 나른하게 익은 팔, 다리가 하나씩 빠져나왔다. 그런 어머니의 등에 얼굴을 가만히 대어보곤 했다. 그때 그 냄새를 그에게서도 맡을 수 있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숟가락 포갠 것처럼 나란히 잠이 들고, 또 그렇게 잠에서 깨었다. 온몸이 밀착되어 오는 느낌, 온 등판이 그의 가슴에 따듯하게 데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마다 나는 노릇하게 잘 구워진 식빵이 되었다.

우리 같이 사는 건 어때? 지금 당장. 그는 말했다. '지금 당장' 은 그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하루에도 그는 몇 번씩 그렇게 말했다. 그는 '다음'이란 것이 없는 남자였다. 그때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은 아무도 '지금 당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다음엔 꼭 같이 하자. 다음엔. 세상은 늘 그렇게 말했고 '다음'이란 시간은 오지 않았다. 그래선지 그는 특별해 보였다. 생각해 보면 그는 '순간'을 사는 남자였다. 세상에 '다음' 같은 건 없어. 카르페디엠. 그는 섹스가 끝난 후에도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이 순간을 살아. 죽음 같은 이 느낌. 이게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지. 그는 내가 서른이 되도록 포기하지 못한 것을 일찌감치 버린 귀여운 이기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발하는 매력은 불순하면서도 거부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의 친절은 네온 불빛처럼 노골적이기도 했고 때론 초저녁의 가로등처럼 은근했다. 처음 이집으로 왔을 때 그는 그의 방과 마주보고 있는 문을 가리켰다. 함부로 들어가지 않을게. 그렇게 말했지만 밤이면 서로의 방에 가만히 숨어들었다.

폭우가 다시 쏟아진다. 아래층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온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악에 받친 여자의 음성이다. 늦은 밤이나 새벽, 복도에서 악다구니 소리와 쾅쾅,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났다. 가끔은 이상한 신음과 교성이 위층까지 올라왔다. 여자의 신음소리는 가냘픈 흐느낌으로 변하고 급기야 통곡으로 변하기도 했다. 여자의 울음소리 너머로 길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박자를 잃은 듯 절정으로 치닫는 첼로와 반도네온 소리도 끝없이 이어진다. 한번만 더 지각하면 자른다고 소리 지르던 소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고객과의 약속은 여러분에게 칼입니다. 여러분 목을 벨 수도 있어요. 고객에게 한 번도 클레임 받지 않은 기록이 날 살리고 있는 겁니다. 소장은 뒷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몇 가닥 남지 않은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빗으며 말했다. 가방 속에서 플래너 수첩을 꺼낸다. 오늘도 한 쌍의 커플이 웨딩마치를 울린다. 시내 중심가의 호텔에서 치르게 될 예식은 두 시다. 하지만 오전에 신부를 만나 웨딩촬영까지 하려면 시간이 빠듯할 것이다. 오늘 신부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샤워기의 물줄기가 세차게 머리 위로 쏟아진다. 그의 전화기는 며칠 째 꺼져있다. 이럴 때 나를 웃게 만드는 가족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얼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어떻게 아파하고 어떻게 빛나는지를 봐주는 사람. 그가 가끔 여동생과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여동생도 그와 비슷한 성격인지 통화하는 내내 그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그 여동생을 질투했다. 그리고 그를 웃게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여동생의 존재, 그런 존재가 나에게도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놈도 참 재수 없는 애였어. 제대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운전자는 빗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를 끌어안고 아이처럼 울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그날 비만 오지 않았어도. 네 아버지도, 그 애도 어쩌다……. 운이 나빴던 게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던 어머니도 운이 좋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몸집은 가냘팠지만 절 입구의 사천왕처럼 여장부의 모습으로 아버지 없는 내게 아무도 손가락질 못하게 지켜주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일을 도우기 위해 가게로 간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너 죽고 나 죽는 꼴 보기 싫으면 가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눈을 부릅떴다. 또,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라 얕보고 수작을 거는 손님 앞에서 돼지기름이 흐르는 불판을 뒤집어엎기도 했다. 그런 어머니도 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담배 연기만 맡아도 손을 훼훼 내젓던 양반이 폐암 말기라니. 병원 몇 군데를 전전했다. 손 쓸 시기가 지난 후여서 고통 없이 죽기만을 바랐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혼자가 되었다. 내 옆에 있던 것들은 새벽이 지나면 사라지는 유성처럼 하나씩 사라진다. 우연처럼 그렇게 되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더 이상 '다음'을 약속하지 않고 떠나갔다는 점이다. 운이 없는 엄마에게서 운이 없는 딸이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지만 내게는 오히려 그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처음부터 운이 없었던 여자는 운 같은 걸 바라지 않는 법도 배운다. 그리고 운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 또한 배운다. 그를 만나고 또 그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운도 때로는 길을 잃어 내게로 오는구나 생각했다.

아래층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다시 올라온다. 빗소리와 어울려 자장가처럼 높낮이가 단조롭고 집요하다. 거울 앞에서 진한 색깔의 립스틱을 바르고 펜슬로 아이라인을 그린다. 움푹 들어간 눈이 그나마 생기 있어 보인다. 오늘은 흑장미 색깔의 블라우스에 검은 스커트를 입을 것이다. CD가 잠시 멈췄다 다시 돌아간다. '리베르 탱고'가 흘러나온다. 나도 모르게 반도네온과 첼로 소리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거실을 탱고 스텝으로 한 바퀴 돈다. 그의 팔이, 그의 손이 가슴께로, 겨드랑이 사이로 감겨오는 것 같다. 등을 쭈욱 펴본다. 탱고의 기본은 대나무처럼 곧은 어깨와 얼굴의 각도야. 그의 목소리가 머리 속에서 튀어나온다. 배에 힘을 줘. 그리고 등을 펴.

그의 가방 안에는 CD가 항상 들어있었다. 고객과 약속이 없는 평일 그가 부려놓은 CD들을 차례대로 들었다. 죽음의 무도, 천사의 죽음, 열정적인 탱고가 죽음과 어울려? 제목에 '죽음'이 들어가는 게 왜 이렇게 많지? 발을 까딱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몰라서 하는 소리. 암 말기 할머니한테 죽기 전에 뭐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탱고가 추고 싶다고 했다쟎아. 정말? 죽음이 코앞인데 탱고라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게 본능 아냐?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아름답잖아. 은발의 탱고라면 더더욱. 그는 경이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느새 곡이 바뀌어 아코디언 소리와 비슷한 악기가 메인 테마를 연주하고 있었다. 아, 이곡은 또 뭐야? 심장이 조이는 것 같아. 숨을 못 쉬겠는 걸? 처음 듣는 곡이었다. 죽이지.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 '자유의 탱고'지. 근데 탱고가 흑인들에게서 전해진 춤이라는 것 알아? 그는 물었다. 정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처음 배에 실려 대양을 건너는 동안 창고에 갇혀서 뭘 했겠어? 좁고 컴컴하고 냄새나는 그곳에서 춤을 췄대. 서로 몸을 부딪치고, 만지면서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다는 거야. 나는 으으, 겁먹은 흉내를 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잔인해. 상상해봐. 어둠 속에서 추었을 춤이 얼마나 격정적이고 처연했을지. 탱고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게 진짜 탱고지. 죽음에 버금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의 스킨십. 에로틱하잖아. 이렇게 말야. 그는 장난스럽게 내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내 입술에 묻은 딸기 셰이크를 빨았다. 그의 입술도 금방 붉어졌다. 반도네온과 첼로처럼 격정적으로 둘은 몸을 섞었다. 카르페디엠. 마지막 가쁜 숨을 뱉어내며 그는 말했다.

문을 두드린다. 좁고 긴 복도 끝에 나는 서 있다. 사각 무늬가 빽빽한 벽과 높이를 알 수 없는 천장. 그곳에 노란 물이 차오른다. 구두 굽을 적신 물은 무릎까지 순식간에 올라와 찰랑거린다. 포르말린 냄새가 진동한다.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문을 두드린다. 텅텅, 빈 소리만 허공에 되돌릴 뿐이다.

경적소리에 눈을 뜬다. 앞차는 벌써 출발했다. 허둥지둥 기어를 넣고 액셀을 밟는다. 아스팔트에 닿은 타이어는 끈적한 마찰음을 낸다. 백미러에 비친 눈이 더 빨개져 있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이 또 꿈을 꾸었다. 몸은 녹아내리면서도 약기운 때문인지 정신은 명료하다. 아직도 포르말린 냄새가 코끝에 남아있다. 매번 반복되는 꿈이다. 비 때문인지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온다. 그날처럼 온몸이 얼어붙는다.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움츠린다.

석 달 전이었다. 섹스가 끝난 후 미역줄기처럼 풀어진 몸으로 그의 등을 쓸며 누워 있을 때였다. 그가 내 아랫배 한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여기 이게 뭐지? 뭐가 손에 잡혀. 며칠 후, 젊은 여의사도 내 배를 손으로 꾹꾹 눌러보고 문지르며 답답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미혼인 것 같은데 어쩌자고 이렇게나 되도록 몰랐어요? 여길 봐요. 여의사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아랫배에 스캐너 같은 기구가 지나갈 때마다 어깨를 움츠렸다. 띠띠띠 기계음과 함께 모니터의 검은 화면은 바뀌었다. 하얀 덩어리가 화면 전체에 퍼져있었다. 연못 속에 몽글몽글 뭉쳐있는 개구리알 같기도 하고 성글게 달린 포도송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의사는 지시봉으로 책상 위에 놓여있는 모형을 가리켰다. T자 모양의 나팔관을 단면으로 잘라놓은 모형이었다. 보이죠? 이 막에 둘러싸인 종 모양의 방. 아까 모니터로 봤죠? 이 안에 그런 게 십여 개가 들었어요. 주먹 만한 게 한 개, 포도 알맹이 만한 것들이 모인 덩어리가 두어 개. 볕이 붉고 말랑말랑해 보이고 약간은 징그럽게 생긴 그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지 않아야 할 것이 들어있다는 말은 마치 갖지 말아야 할 나쁜 품성이나 도벽을 가졌다는 말처럼 들렸다. 몇 주가 지난 후 종합병원 침대에 다시 누웠다. 다리를 걸대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몸을 무방비하게 열어놓은 자세가 더없이 불안했다. 그날 노의사는 자궁과 나팔관 하나가 내 몸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선고했다. 노의사의 말은 너무 가벼워, 수술용 칼에 의해 냉정하게 잘려나갈 몸 일부가 정육점에 걸린, 한 근도 안 되는 고깃덩이처럼 느껴졌다. 병원 문을 나서자 노란 하늘이 맴맴맴맴 끝도 없이 맴을 돌았다.

며칠 후, 희미한 빛을 따라 의식에 처음 감지된 것은 옅은 포르말린 냄새였다. 음습하고 싸늘한 바람, 축축하고 끈적한 느낌의 온갖 불쾌한 것들을 모두 모아놓고 얼린 것 같은 공기, 그 사이에서 맡아지던 포르말린 냄새를 맡으며 마취에서 깨어났다. 한기에 파들파들 떨면서 회복실에서 눈을 떴다. 학교 어둑한 생물실에 들어가면 처음으로 맡아지던 냄새, 검은 커튼 사이로 비쳐든 볕에 희미하게 드러난 시험관들, 표본을 보존하는 원통형의 투명한 시험관 속에 담겨있던 정체 모를 생물들과 장기들, 그 틈에 누워있는 듯했다. 퉁퉁 분 몸으로 노리끼리한 포르말린 속에 푹 잠겨있는 광경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만 부릅뜬 모습이 떠올랐다. 몹시 추웠다. 마치 해가 들지 않는 배 밑바닥에 흑인 노예처럼 던져진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를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나는 마냥 몸을 떨었다. 깜깜한 곳에서 서로 몸을 부딪치고 만지면서 외로움과 죽음과 절망에 대한 공포를 이겨냈을 그 축축한 밤을 떠올렸다. 검은 피부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하얀 눈동자를 반짝이며 리듬에 맞춰 서로의 몸을 더듬는 것을 멈출 수 없었을 시간 속으로 정신없이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이를 덜덜 떨면서 그와 함께 추었던 탱고를 떠올렸다. 한 박자라도 놓치면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하고 길을 잃을 것처럼, 끊임없이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더위와 땀, 썩는 냄새와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들과 함께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동안 개미와 바퀴벌레, 날파리, 모기 등 손에 잡히는 모든 생물들이 내 손끝에 야무지게 눌려 죽어나갔다. 그 후부터였다. 잠에서 깰 때마다 포르말린 냄새를 맡았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끔은 꿈속에서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포도송이들이 물속에 퉁퉁 분 채 잠겨있는 것을 보았다. 자궁은 풍선처럼 부풀다가 펑 터졌다. 종내 포르말린 속에 담긴 내 모습을 보면서 잠에서 깼다. 몸에서 덜어낸 것은 겨우 51그람밖에 안 된다고 의사는 말했지만 그 자리에 51킬로그램의 돌덩이가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점점 퇴화되어가는 꼬리뼈처럼 아랫도리는 화석처럼 굳어졌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와의 관계는 낯선 사내와 추는 탱고 같았다. 수줍었으며 그래서 슬펐고 당황스러웠다. 살아있지만 아무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몸에서, 썩지도 못하면서 서서히 발효되는 과정처럼 시고 씁쓸하고 들큰한 냄새가 났다. 그때부터였을까 그는 들어오는 날보다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그의 전화기는 늘 꺼져있었다.

쏟아지는 잠 때문에 눈꺼풀이 무겁다. 눈을 껌벅인다. 출근도장만 찍고 다시 시내로 향한다. 예식 때문에 호텔 앞 도로는 꽉 막혀있다. 결혼식은 붐볐다. 긴장 때문인지 대기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신부는 나를 보자 화색이 돌았다. 황금색 주단 위로 신부는 걸어 들어갔다. 폐백과 피로연을 마친 후 두 사람이 공항으로 출발하는 것까지 오늘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녹초가 되었다. 블라우스는 구겨지고, 구두는 비에 젖었다. 사무실에는 모두 외근 중인지 소장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플래너를 확인한다. 다음주쯤 있을 예식의 폐백 음식 주문할 업체를 물색한다.

액자 하나가 책상 위에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야외 밀롱가에서 사람들이 짝을 맞추어 탱고를 추고 있다. 사람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춤을 춘다. 그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산 포스터다. 영화 속의 군무는 장엄했다. 사진은 역광을 받은 드레스의 실루엣 때문에 강렬하게 보인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그는 말했다. 우리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거야. 그곳의 어느 골목 끝 밀롱가에서 춤을 추는 거야. 그리고 그 춤이 끝나면 우리는 거기서 섹스를 할 거야. 죽음보다 더 격정적으로.

얼마 전, 우리가 간 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밀롱가가 아니었다. 홀연히 사라졌다 열흘 만에 돌아온 그에게 기차표를 내밀었다. 마지못해 그는 따라나섰다. 일출 관광객이 떠난 휴양지는 쓸쓸했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스산했다. 하지만 올라오는 길은 더 스산했다.

세상은 모두 흙빛이었다. 검은 구름에 가려 노랗게 해가 져가는 바다는 세상의 끝 같은 비운의 느낌이 진했다. 두 사람은 바다를 배경으로 탱고를 추었다. 탱고를 출 때만큼은 예전의 그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탱고를 추고 있는 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구레나룻이 부드럽게 뺨을 스쳤다. 더 이상 운이라고는 올 것 같지 않던 생이 벌을 거두고 또 한 번 기회를 주려나 기대했다. 몸은 이곳이지만 마음은 밀롱가 무대 한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다. 환호성이 들렸다.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남자들의 휘파람소리, 반도네온 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하지만 탱고가 끝나자 밀롱가는 사라졌다. 휘파람도 박수소리도 환호성도 모두.

구름 사이로 붉은 해가 내비치기 시작하자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천상의 붉은 빛이 곧게 떨어지자 바다는 붉은 잉크를 풀어놓은 것처럼 붉게 타올랐다. 불구덩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군. 너무 환상적이야. 해가 떨어지는 바다는 그야말로 불구덩이였다. 어쩌면 지옥불처럼 타오르는 바다인지도 몰랐다. 끝을 알 수 없는 구덩이 속에 얼굴을 박고 있는 것처럼 눈이 시큰거렸다. 푹푹 빠지는 모래 때문에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모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수천 년이 흐르면서 바위가 깎이고 또 깎여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상처가 아물기 전에 새로운 상처가 패듯, 그렇게 생긴 구덩이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해가 지고 난 후, 초승달이 떴다. 세상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 각기 해와 달이 함께 떠 있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은 사막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그는 그 밤 다시 사라졌다. 예약해놓았던 랍스타 2인분이 식어갈 때쯤 소주 한 병을 비웠다.

휴대폰이 울린다. 죽고 싶어요. 유럽으로 신혼여행 간 신부의 첫마디가 죽고 싶다니.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여자였다. 우리 선우씨, 선우씨, 하고 부르던 콧소리가 떠오른다. 언니는 참 웃는 모습이 예쁘네요.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한 번도 제 손으로 노동하고 돈을 벌어야 할 필요가 없는 신부는, 눈꼬리에 부챗살을 만들고 '하와이' '와이키키' 하며 입술 끝을 올리면, 우아하고 완벽한 비즈니스용 웃음이 된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모니터의 시간을 본다. 지금쯤 파리의 한 호텔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그녀는 결혼식 날까지 밤이며 낮이며 전화를 걸어왔다. 이 결혼 정말 해도 되는 걸까요? 오빠가 갑자기 변한 것 같아요. 웨딩 촬영 도중에도 말다툼이 생기면 곧장 쪼르르 달려와 언니, 하며 훌쩍거렸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수도 없이 겪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얼굴은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을 잃지 않았었다. 그리고 어제도 그녀에게서 메일이 왔었다. 저희들 신혼여행 잘 도착했어요. 예쁘게 잘 살게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모티콘이 가볍게 윙크를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무슨 일일까? 아무 말 없이 훌쩍이기만 하던 그녀의 전화가 끊어진다. 가끔 고객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다보면 받지 않을 때가 있었다. 사고 소식을 듣기도 했다. 사람 사는 곳에서 무슨 일이 못 일어나랴만 그 때마다 허탈해지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내내 마음에 걸린다.

길을 막고 있는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자신에게 묻는다. 다시 녹색등이 켜졌다. 길은 사방으로 나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생각나지 않는다. 끝없이 이어진 길과 차들, 빗속에 서 있는 가로수만이 무심히 날 지켜보고 있다. 멀리서 와인 바의 네온 불빛이 반짝인다. 불량하지만 다정한 친구처럼 손짓한다. 그녀의 울음소리를 안주 삼아 와인 한 병을 비운다.

바에서 마신 술기운에 피로까지 겹쳐 다리가 후들거린다. 보라색으로 멍든 하늘을 본다. 내일은 고객의 예복을 찾아야 하고, 또 가구 고르는 데 따라가기로 했다. 까다로운 고객은 마음에 드는 콘솔을 발견하지 못해 벌써 몇 번째 호출이다. 수입가구점 몇 군데를 돌아야 할지도 모른다. 고단한 하루가 될 것이다. 대학교 다닐 때부터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다. 첫 아르바이트는 도심 한복판의 인공호수가 보이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시작했다. 장난치는 아이들을 달래고, 생일 축하곡을 부르고, 아이들이 분탕질해 놓고 간 빈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 사이 테이블을 오가며 시험 요약집을 훔쳐보았다. 고개를 들어 보면 이미 노을 같은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알바로 등록금을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대출금은 쌓였다. 졸업 후 직장을 가진 후에도 여전히 대출금을 갚았고,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밤샘 알바를 했다. 가끔 대출금 통장을 보면서 외롭다고 생각했고, 당장 올려줘야 할 월세 액수가 머릿속에 고치처럼 들어앉아 있을 때는 그가 옆에 있어도 외로웠다. 나는 가난하면 외로워진다고 했고, 그는 외로우면 가난해진다고 했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외로운가.

비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다. 다리가 휘청거린다. 아파트로 들어가는 골목길로 접어든다. 불규칙한 발짝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다가온다. 어느 틈엔가 우산 아래로 바싹 다가선 사내는 무슨 말인가를 웅얼거린다. 입에서 음식물과 술이 한데 섞인 냄새가 난다. 출렁거리던 사내의 어깨가 내 어깨에 부딪친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비도 오는데 어디 가서 한잔 어때? 사내가 앞을 가로막고 내 어깨를 움켜쥔다. 움찔 어깨를 털어내자 팔을 잡아끈다. 너, 혼자잖아. 이야기 좀 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빛이 흐리멍덩하게 나를 향한다.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새털처럼 가벼울 것이다. 가방 속에 있는 뾰족한 것들을 모두 떠올린다. 나는 우산을 팽개치고 달리고 또 달린다. 불운하게 부모를 여의고, 제 몸이 도려져 나가는 것을 지켜봐 준 남자를 또 떠나보낸 여자는 비오는 밤 홀로 걷지 않아도 세상이 무서운 법이다. 발짝 소리가 탱고 스텝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빗줄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점점 희미해진다. 입간판이 발에 부딪쳐 나동그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철퍽 바닥에 주저앉았다.

스커트에서 물이 떨어진다. 집은 여전히 비어있다. 흙탕물이 튄 구두와, 빗물과 핏물이 얼룩진 스타킹을 차례로 벗어놓는다. 열어놓은 창으로 비가 들이친다. 그의 방문 앞에 서서 가만히 노크를 한다. 금방이라도 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을 열릴 것 같다. 평소에는 들어가는 것조차 떨렸던 방이다. 처음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던 덥고 후끈한 열기가 떠오른다. 그의 몸에서 나온 열기가 고스란히 채워져 있던 방. 그래서 들어갈 때마다 숨이 막혔던 방이다. 손잡이를 돌리자 문이 스르르 열린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 눅눅해 보이는 침대와 축축한 기운이 서린 벽이 있다. CD들이 장식장 위 CD꽂이에 그대로 꽂혀있다.

변한 것이 없는 가운데서는 조그만 변화도 때로는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언제부턴가 콘돔이 들어있던 서랍이 비어있었다. 이 서랍에 있던 것, 언제부터 없어진 거지? 막 섹스가 끝난 후였다. 얼마 전에. 근데 왜? 그가 내 가슴 위에서 얼굴을 들며 말했다. 내가 그의 양팔 사이에서 빠져나가자 그 틈에 그의 것이 쑥 빠져나갔다. 갑자기 안식처를 잃은 그것은 한참을 곤혹스럽게 덜렁거렸다. 옷을 집어 들고 일어나던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손이 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마음 한구석에 시린 바람이 지나갔다. 지난 번 방을 정리하면서 안 쓰는 물건이다 싶어서 무심코 치웠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술을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구덩이 속으로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을 떨어지고서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넌 처음부터 독신주의자였고 임신 같은 건 원하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그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냥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는 거야. 살다보면 또 좋은 일이 있을지 누가 아니?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게 뭐지? 그리고 나한테 좋은 일이 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마 그가 떠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 이제 그만 할까. 파트너 바꿀 때도 되지 않았어? 평생 이렇게 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나는 빈정거렸다. 물론. 하지만 그냥 이렇게 헤어지면 넌 어쩌려고? 죽기야 하겠어? 그가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말했다. 정말 괜찮겠어? 탱고 파트너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해. 아무하고나 춤추지 않는 거 알지? 넌 언제나 오케이야. 그는 눈을 찡긋해보였다. 약이 올랐다. 근데 나는 왜 그걸 모르는 거지? 왜? 탁자 아래에 있던 CD 케이스를 거울을 향해 집어던졌다. 케이스는 옆으로 날아가 그의 머리에 정확히 맞았다. 쏟아져 나온 CD들이 거울에 부딪치고 흩어졌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고개를 들었을 때 거울 속에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방사형으로 금이 간 거울은 여자의 몸을 기하학적으로 분할해놓았다. 그는 셔츠로 내 어깨를 덮어주고 곧장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맨발로 그를 쫒따라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을 때 이미 그의 차는 떠나고 있었다.

폭우가 다시 쏟아진다. 어느 새 아래층 여자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빗속에서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번개가 번쩍 하자 격자창의 그림자가 벽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빗소리 너머로 길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창밖을 내다본다. 빗방울은 시멘트 바닥을 뚫어버리기라도 하듯 매섭게 내리꽂힌다. 베란다 난간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있던 빗물은 제 무게를 감당 못해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매트 위를 걸을 때처럼 몸이 기우뚱거린다.

수면제 몇 알을 삼키고 소파에 눕는다. 세상이 개벽을 해도 커플들은 쏟아져 나온다. 좋은 일이다. 내일 신부에게 예쁜 콘솔을 골라준 후 돌아와 때목욕을 하고 달콤한 초콜릿 요리를 할 것이다. 마음과는 반대로 몸은 점점 더 가라앉는다. 이대로 잠들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 죽음의 저쪽도 아니고 이쪽도 아닌 그 중간쯤에 머무른 것 같은 표정으로 꿈을 꾸는 것일까. 달콤한 냄새와 함께 뜨거운 입김이 귓가에 전해진다. 어서 눈을 떠. 그는 딸기 셰이크 묻은 입술로 내 입술을 더듬고 귀에 속삭인다. 저 소리 들리지 않아? 어서 눈을 떠. 아직 끝나지 않았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린다. 어느새 리베르 탱고의 반도네온 소리가 이명처럼 울린다. 내 앞에 한 사내가 서 있다. 사내 뒤로 아프리카의 대평원이 펼쳐지고 그 평원 너머 해가 지고 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검은 피부와 노동으로 단련된 근육, 건강한 생기와 고통 앞에 의연한 눈망울이 나를 바라본다. 검고 굵은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반짝인다. 그가 콜타르처럼 검은 손을 내민다. 내 손의 두 배는 됨직한 커다랗고 두꺼운 손이다. 그 손이 내 손을 힘주어 잡는다. 악력이 나를 지탱한다. 사내가 먼저 첫 발을 떼자 나도 엉거주춤 발을 움직인다. 바짝 다가오는 시선에 숨이 막힌다. 그가 앞으로 전진할 때 나는 뒤로 물러난다. 그가 뒤로 물러나면 나는 주춤 앞으로 다가선다. 맞잡은 손과 손, 대칭을 이루는 어깨, 서로 엇갈린 다리, 맞닿을 듯 밀착된 가슴. 피가 얼굴로 몰리고 호흡이 가빠져온다. 어느새 빨간 구두가 발을 조이고 있다. 사내가 내 몸을 돌릴 때마다 사내의 검은 손이 배를 지나가고, 발을 바꿀 때마다 허벅지가 부딪친다. 가슴이 뛰고 온몸이 스멀스멀 간지러워온다. 그의 가슴이, 그의 배가 내 몸에 닿을 때마다, 그리고 그의 팔꿈치가 가슴을 스칠 때마다 관능이 살아난다. 호흡은 가빠지고 피돌기도 빨라진다. 어려워. 발은 꼬이고 머리는 어지러워. 힘없이 중얼거리면서도 발은 빠르게 움직인다. 박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검고 검어 먹빛이 나는 손을 움켜잡는다. 아래층 여자의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탱고는 점점 더 빨라진다. 밀롱가의 환호성도, 그도 없지만 춤을 멈추지 않는다. 어느새 아프리카의 대평원에서 장엄한 군무가 펼쳐진다. 그 너머로 아득한 시간이 흘러간다. 나는 어깨를 더 빳빳이 뒤로 젖히고 턱을 치켜든다. 어둠 속에서 혼자 빙글빙글 돌아간다.

김은아

◆ 약력

▷ 1967년 대구 출생

▷ 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과 졸업

□ 당선소감

새벽에 깨어나 하늘을 보는 일이 많다.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사는 게. 그래서 영악해지고 싶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 없는 길을 찾고, 그 안에서 어렴풋이나마 삶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고통과 기쁨, 그 사이에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초연하고 무연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행복도 불행도 모두 내 의지이고 싶었다. 그때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오빠의 가방은 보물 상자였다. 그 안에서 쏟아지는 것들은 사춘기의 나에게 신기하고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오빠가 들려주는 음악은 지치고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아직 내 보물 상자는 열리지 않았다. 삶의 실체라는 것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다만 삶에 겁을 먹지 않을 만큼의 용기를 얻는다.

무엇보다 한발 더 세상에 다가가게 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언제나 든든한 바위인 박상우 선생님, 어려운 길을 함께 가준 소행성 문우와 이제는 내 동기 같은 독서모임 친구들, 그리고 무딘 나를 견뎌준 나의 형제, 가족에게 고마운 마음 전한다. 내게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었다면 그것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두려운 마음뿐이다.

김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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