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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욱의 달구벌이야기]어머니 같은 존재 비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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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산 겨울풍경
비슬산 겨울풍경

비슬산(琵瑟山)은 품이 넉넉해서 달구벌 사람들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다. 지형은 북으로 팔공, 남으로 비슬의 산세가 큰 언덕을 형성하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앞산은 비슬산 끝자락에 해당하는데, 해발 1천84m 높이의 대견봉이 최고봉이다.

주위에 청룡산(靑龍山)·최정산(最頂山)·우미산·홍두깨산이 있다. 비슬산의 정상부는 평탄하고, 남쪽과 북쪽은 급경사의 절벽이며, 북동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달구벌은 기운이 뭉쳐 있는 고장이라 하였다. 그 기운은 비슬산에서 시작하여 최정산~수도산~연귀산~아미산에 이르러 멈춘다고 하였다.

그리고 비슬산의 '비(琵)'는 고대 악기인 비파를 뜻하고, '슬(瑟)'은 큰 거문고를 뜻한다.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산이다. 봄철에 피는 진달래와 철쭉, 산의 능선을 따라 자생하는 억새풀, 그리고 병풍처럼 세워진 바위들이 어우러져 장관이다. 1986년 비슬산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이름의 어감이 참 좋은 이 산은 불교와 인연이 깊다. '비슬'이란 말은 고대 인도 힌두의 신으로, 불교에 수용된 '비슈누'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비롯된 말이다. 신라시대에는 포산(包山)이라 불린 이곳에서 관기와 도성이라는 두 성인이 수행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의 '포산이성(包山二聖)'조에 실려 있고, 그 책을 지은 일연 스님 또한 이곳에서 수행했다.

고려 성종 때는 아미타신앙을 바탕으로 한 결사가 이곳에서 이뤄지기도 했다. 그 동안 여러 절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사·용연사·용천사·소재사·임휴사 같은 사찰이 지금껏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대견사(大見寺)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절터만 남아 있는데, 폐사지를 멀리서 바라보면 산세가 책상처럼 반듯하면서 비스듬하게 내려가는 형상이다. 그 모습이 마치 무릎 위에 놓여진 거문고나 가야금처럼 보인다.

비슬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용연사(龍淵寺)가 있다. 용연사는 신라 신덕왕 1년(서기 912년)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보양국사는 운문사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바로 그 스님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세종 1년(서기1419년) 해운당(海雲堂) 천일(天日)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왜병들의 방화와 약탈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에 사명대사가 인잠·탄옥·경천 스님 등에 명하여 재건토록 하여 대웅전을 비롯해 다섯 동의 전각이 들어섰고, 20여 명의 승려들이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효종 1년(서기 1650년) 불이 나서 종각만을 남긴 채 다 타버렸고, 이를 10여 년에 걸쳐 다시 복구하여 이백 수십 칸이 넘는 대가람으로 자리 잡았다.

그 뒤 현종 14년(서기 1673년) 석가여래부도 곧 불사리탑을 세웠고, 적멸보궁을 갖춘 절이 되었다. 적멸보궁 법당은 여느 보궁의 그것처럼 안에 불상을 안치하지 않고 뒷벽을 틔워 사리탑에 바로 예배할 수 있도록 내부를 꾸몄다. 경내에는 석조 계단·석가여래 팔상·사명당 영정·극락전·향로전·보광루 같은 소중한 유적들이 있다.

비슬산은 자연경관이 빼어났을 뿐 아니라 선인들의 숨결이 깃들인 문화유적이 많이 있다. 그리고 산정에서 유유히 감돌아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저런 즐거움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이다. 그뿐이랴. 산자락에 위치한 현풍지역 일대에 대규모 첨단과학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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