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달구벌 이야기](3)달성토성

달구벌에 축조된 최초의 성 도심 재창조 시발점 돼야

달성토성(達城土城)은 달성공원의 옛 이름이다. 또한 달구벌을 상징하는 역사적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이나 가치에 대한 인식과 홍보 부족으로 그 동안 까맣게 잊혀져 왔다. 그런가 하면 갈 곳 없는 노인들의 놀이터이자, 힘이 빠진 동물들이 엎드려 졸고 있는 나른한 쉼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은 우선 명칭을 옛 이름인 '달성토성'으로 바꿀 것을 꾸준히 요구해 왔다. 그와 함께 동물원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인근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적과 연계한 종합적인 복원계획을 마련함으로써 도심 재창조의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하고 있다. 달성토성은 달구벌에서 축초된 최초의 성이다. 학자들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 세력을 이뤘던 집단들의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달성토성은 고려 중엽인 정종(서기1035~46년) 때부터 달성 서씨들의 세거지였다. 그러다가 조선조 세종 때에 이르러 관아 부지로 결정되자 쾌히 내놓았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 포상을 내리려 하였으나 종손인 구계(龜溪) 서침(徐沈) 선생은 그 대신 주민들이 관아에서 빌린 환곡의 이자를 감해 줄 것을 건의, 허락 받았다. 그 같은 배려로 해서 서침 선생은 주민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조정으로부터 옛 남산병원 일대의 토지를 하사 받았다. 성안에 먹을 물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그런 가운데 주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어느 곳을 파 보라"고 해서 일러준대로 팠더니 물이 나왔다고 전한다. 샘물은 찰 뿐 아니라 맛도 좋아서 영천(靈泉)이라 불렀다. 어느 날 조정에서 높은 벼슬아치가 오자,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물을 한 바가지 퍼 오라"고 했다. 그래서 달려가 물을 길어 올렸더니 두레박 안에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담겨 있었다. 쏟아버릴까 하다가 이전에 없었던 일이라 그대로 가져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더니, "물맛이 참 좋다"고 칭찬하면서 "잉어는 음식으로 만들라"고 하였다. 그 뒤부터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 인원만큼 잉어가 나와서 '잉어샘'이라 불렀다고도 전해 진다. 하지만 그 자리가 어딘지 알 수는 없다. 1909년 1월 11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 황제가 시찰했다. 그날 130년 수령의 가이즈카 향나무 한 그루를 기념 식수했다. 지금 껏 잘 자라서 거목이 돼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면 얼룩진 흔적들도 있다. 1894년 청일전쟁 때는 동학혁명군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일본 병참부대가 주둔했고, 종전 후에도 철수하지 않고 헌병대와 통신수비대를 잔류시켰으며, 1904년 일본 수비대장과 일본 거류민단은 달성토성의 공원화 계획을 세워 이듬해 공원으로 조성했다. 1906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황대신궁(皇大神宮) 요배전(遙拜殿)을 세움으로써 우리 문화를 말살하고 우리 민족을 황국신민화하려는 정책을 폈다. 이 신사는 해방 후에도 한동안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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